gypsum, wood, silicon, 45*45*15cm, 2006
망각에 대한 소고_1
흔히 고통과 쾌락은 만날 수 없는 전혀 다른 층위(가해와 피해 혹은 선과 악 혹은 진보와 퇴보의 층위)에 존재하는 것처럼 늘 이야기되지만, 마치 다른 이름을 가진 하나의 몸처럼, 이 둘은 그리 쉬이 분리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육체 내부의 감각에서 지압은(마사지의 한 형태로) 특정한 물리적 통증을 동반하지만 익숙해진 뒤의 이 감각은 점차 어떤 쾌감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러한 내적 감각의 역설적 관계는 드물지 않다. 고추의 캡사이신, 홍어의 암모니아, 보디빌딩, 마라톤, 아드레날린을 일으키는 격한 운동들, 여러 피학적 성양식들, 마조히즘, 자해증. 아물지 않은 상처의 딱지 떼어내기. 수많은 종교적 고행의 양식들. 이것들은 일상 속에서 외부의 이분법적 규정의 경계를 넘나드는 어떤 내부적인 것들이다.
대부분의 노동이 더 이상 어떤 숙명적 의무가 아닌 재화획득을 위한 일반적 고통(분명 돈이 있다면 하지 않아도 될 어떤)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오늘날, 일상의 재화들은 그 생산과 유통의 과정 속에서 연루된 다수의 고통(노동)을 거쳐 최종적으로 소비자의 쾌락으로 전달되어 진다. 수많은 데이터에 근거해 촘촘하게 분석된 고속의 전산망 속에서 누군가의 쾌락은 누군가의 고통을 담보로 끊임없이 미시화 되고 더 빠르게 순환한다. 결국 매일 우리의 작은 쾌락을 위해 배달되는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매력적인 재화의 모습을 한 익명의 고통 누적 체이다. 하지만 그것을 직시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자학적이거나 혹은 대단히 무의미해 보이기 마련이다. (대부분은 그저 주어진 삶에 충실히 살았을 뿐이므로) 게다가 고통을 최소화하고 쾌락을 증폭하는 일은 근대 이후 가장 추앙받아온 미덕이므로 결국 우리는 망각의 기술을 통해 찰나의 혼란 속에서 쾌락과 고통을 다시 분리해내고 일상의 쾌락을 쟁취한다.
망각은 특별한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제도를 의심하지 않는 것, 상품(제도)의 광고를 의심하지 않는 것 그리고 주어진 일상을 의심하지 않는 것만으로 쾌락과 고통은 눈금의 위와 아래로, 천국과 지옥으로 각각 소리 없이 분리되고 수거되어진다. 그리고 여기서 벌어진 터무니 없는 위상차의 에너지는 유통망 속의 고통과 쾌락의 순환을 극적으로 가속시킨다. (광고는 그러한 대표적 망각 술 중 하나이다. 이 고통과 쾌락의 보상 체계에서 포장지를 채운 광고의 궁극적 기능은 늘 같다 - 고통의 기억을 제거하고 서사 부재의 재화 위에 새로운 욕망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 - 고통의 망각을 통해 고통과 쾌락의 위상차를 증폭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쾌락의 과잉은 곧 그것이 필연적으로 담보한 고통의 과잉을 생산한다. (도파민의 위상차에 의해 금단증상을 보이는 중독자들을 생각해보자) 한데 그 과잉된 고통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분명 그것은 그저 망각 되었을 뿐 결코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일상이라는 망각의 안개 속 가득 흩뿌려진 이유 모를 불안을 들이마시며 살아간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담보하고 보증하는 고통과 쾌락은 거대한 망각에 의해 분리된 서로의 들숨과 날숨이다. 망각의 장막은 ‘고통스러운 쾌락’ 이나 ‘쾌락적 고통’과 같은 호흡 정지(판단 정지)의 사태에서 비로소 잠시 빈틈을 드러내지만, 곧 그 균열은 제도가 준비한 안전하고 공정한(망각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만) 절차를 거쳐 다시 장막(일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예를 들면 일상에서 커피 원두와 패스트패션 그리고 다이아몬드는 늘 소비되지만, 그것이 약 3억 명의 제삼 세계 아동노동 착취의 결과라는 사실은 거의 기억되지 않는다) 하물며 모든 고통이 만족지연의 원자재로 가공되어버린 오늘날 쾌락을 직시하는 일은 그리고 그리하여 잊혀진 고통을 표면 위로 떠올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가능성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쾌락을 그리고 고통을 직시하는 일이 여전히 언제나 가치 있는 한가지 이유는 그 고통스럽고 불편한 시각만이 ‘누가 우리를 쾌락과 고통의 범주로, 정의와 불경의 범주로 그리고 그 무엇이 고통과 쾌락 모두를 무한한 자원의 영역으로 인도하였는가’ 에 관한 첫 번째 질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