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i gerecht! (정의로워라!) _ 2021 우민미술상 수상작가 김상진 개인전 비평문


글 _ 강정호  




I


푸른 하늘에 하얀 페니스가 있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Jeff Bezos)가 탄 우주선이 대기권을 향해 솟아오르는 광경이다. 영화 <오스틴 파워 2>(1999)에 등장하는 남근 우주선에 대한 오마주처럼 느껴지는 그 이미지는 올해를 대표하는 밈(Meme)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팬데믹이 장기화되고 기후 위기의 재난이 부국과 빈국을 가리지 않는 시기에 가시화된 슈퍼리치들의 지구탈출 경쟁을 기묘한 정조로 표상하고 있다. 


지구를 떠나는 남근의 이미지는 영화 속에 나타났던 20년 전에는 실없는 폭소를 유발했지만, 현실 속에 등장한 지금에는 언캐니한 침묵을 가져온다. 그것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마치 재난 영화에서 스크린을 향해 들이닥쳤던 물길과 불길의 모습이 이제는 SNS에 빈번하게 게시되는 ‘실재’가 되었듯이, 인류의 대다수가 마스크를 쓴 채 이동을 제한당하는(혹은 마스크도 쓰지 못하고 앉은 자리에서 죽어가는) 시기에 우주여행을 천명하며 오염된 지구를 떠나는 연습을 하는 억만장자들의 모습도 ‘실재’이다. 시야에서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는 남근의 형상은 정말 인류의 대다수를 재난 속에 버려둔 채 떠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페니스 로켓’과 ‘이블 박사’의 밈을 SNS에서 열심히 퍼 나르면서도 웃음을 터뜨리지 못한다. 그 대신 자조도, 냉소도, 분노도 아닌 기이한 감정을 느끼며 표정을 묘하게 일그러뜨릴 뿐이다. 


하지만 보다 당혹스러운 건 지구에 남겨져서 바이러스를 벗하며 물길과 불길에 휩쓸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그리 비극적이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심드렁하게 ‘실재’를 관람하고 있다. 스크린을 뚫고 나온 재난이 바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휩쓸어버려도 우린 변함없이 팝콘을 먹고 콜라를 마시며 그 광경을 관람한다. 자신의 차례가 곧 닥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우린 그리 진지하게 심각해지지 못한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그저 조금의 우울과 조금의 짜증일 따름이다. 



II


김상진의 전시 In the Penal Colony(유형지에서)는 이처럼 실재와 가상, 비극과 희극, 폭소와 침묵, 위험과 안전, 노출과 유폐가 종잡을 수 없이 뒤섞이고 있는 현실을 중층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시선이 담겨 있다. 그 시선이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극심한 혼란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생경한 배치나 낯선 짜임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배치와 짜임이 기능을 멈추는 지점이 해부되어야 한다. 작가는 이제까지 그래왔듯 이번 전시에서도 이미 있는 관습, 이념, 욕망, 신앙의 약한 고리에 메스를 댄다.     


이번 전시에 제시된 작업들은 대부분 코로나 사태가 시작되었던 2020년 전후에 제작되었다. ‘유형지에서’라는 표제를 쓴 전시 자체가 팬데믹에 대한 비판적인 대응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재난이 제기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물음은 작가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그의 작업은 인간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의 정합성에 항시 의문을 던져왔다. 그런 까닭에 팬데믹의 도래는 그에게 특별히 새로운 상황이라기보다는 징후로서 감지되었던 인간 세계의 부정합이 현실화되고 전면화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이러한 사태를 기호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수많은 인명피해와 막대한 경제적인 손실을 초래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 세계에 내재되어 있는 기호의 배치와 짜임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면 ‘재난’이라 인지되지 않는다. 반대로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기호의 배치와 짜임에 결정적인 변동을 유발했다면 그것은 명실상부한 재난으로 간주된다.  

  

작가는 오늘날의 상황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그것으로 인한 표면적인 피해나 손실보다는 그것이 유발하는 기호 체계의 균열과 오작동에 더욱 집중한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다른 어느 때보다 기호의 의미작용(signification)이 문제시된다. 실제로 이 전시에서 가장 큰 시각적 비중을 가지는 것은 ‘문자’이다. 전시장에 들어선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인지하게 되는 것은 어둠 속에서 넓은 공간을 점유하면서 드러나는 문자들이다. 



III

 

이 전시는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belief’, ‘hope’, ‘love’로 시작한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장)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귀에 익숙할 구절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인간 세계에서 보편성을 획득했던 이 구절이 이제는 애수를 자아낸다. 그것의 보편성이 돌이킬 수 없게 파손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애틋한 이념을 토대로 삼는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급격하게 해체되고 있고. 생경한 짜임을 지닌 어떤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잣대로 규정할 수 없는 감정, 생각, 행동이 당장 툭툭 불거지는 상황을 직접 경험하고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관객의 발길이 가장 먼저 닿는 장소에 친숙한 생활 이념인 ‘belief’, ‘hope’, ‘love’를 문자로서 게시하였다. 둥근 테두리의 하얀 격자망에 표기된 붉은 글씨는 선명하게 읽히지만 곧 사라질 듯 미약하다. 강렬한 조명 때문에 글씨의 뒤편에는 격자망의 그림자가 거대하게 투영되어 있다. 그런데 실물과 둔중한 대비를 보이는 격자망의 그림자 속에는 글씨가 부재한다. 격자망에 표기된 ‘belief’, ‘hope’, ‘love’는 유령처럼 그림자를 갖지 못한다. 이 신성모독적인 광경은 약간의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킨다. 마치 ”믿음, 소망, 사랑은 이제껏 존재했던 적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이 작업을 감상하고 있으면, 비어 있는 격자망의 그림자가 새로운 기표를 새길 수 있는 빈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IV


다이빙 선수처럼 무릎을 접고 상체를 웅크린 사람이 수중에서 안온하게 회전하고 있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조금 어색한 자세이다. 머리를 너무 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어 의문을 갖게  만든다. 회전을 하고 있어 단번에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곧 그 사람이 자신의 페니스를 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오토펠라치오에 몰입한 남성의 모습이다. 실제 사람이 아니라 그래픽한 영상이라 그런지 외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떤 상징이나 알레고리처럼 느껴진다. 제목은 '나는 이 스테이크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I know this steak is not real)'이다. 이는 자기 쾌락에 폐쇄되어 있는 남성의 독백일 텐데, 그래픽 된 그의 모습 자체가 명백한 가상이기 때문에 묘한 이중 부정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래서 언뜻 영상에 제시된 남성이 오토펠라치오를 가장하여 ’진짜 페니스‘를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남성이 물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페니스가 위치한 지점은 회전하고 있는 하얀 신체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수중을 나타내고 있는 영상 전체의 중심이다. 그래서 단단한 실체가 그 지점에 박혀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더군다나 이 영상이 투사된 벽면의 맞은편에는 '믿음', '소망', '사랑'이 결여된 격자망의 그림자들이 부재의 느낌을 증폭시키고 있어서 'not real'로 제시되었던 남성의 페니스는 그 공간 전체에서 가장 실체감을 지닌 구심점 노릇을 하게 된다.  

 

이처럼 가상의 수중에 감추어져 있는 그 남성의 페니스는, 실제 하늘에 노출되었던 베이조스의 '페니스'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슈퍼리치의 페니스는 'Blue Origin', 'New Shepherd'와 같은 경건하고 아름다운 명칭이 부여됨에도 불구하고 외설적인 가상으로 여겨지는 반면, 그 남성의 페니스는 오토펠라치오라는 폐쇄적인 자위행위의 수단으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감추어진 실체처럼 간주된다. 앞서 언급했듯 작가는 이 영상을 <belief, hope, love>의 맞은편에 위치 시켜, 상호적인 맥락을 형성시키는데, 이때 보이지 않는 페니스는 비어 있는 격자망에 새겨 넣기에 적합한 기표로서 제시된 것처럼 느껴진다.   



V


이 전시의 표제인 In the Penal Colony(유형지에서)는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1919년에 발표한 소설의 제목(In der Strafkolonie)이기도 하다. 그의 이야기에서 ‘유형지’는 기괴한 처형 장치가 놓여 있는 곳이다. 그 장치는 침상에 결박한 죄인의 육체에 그의 죄명을 자동 바늘로 새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동 바늘은 죄인을 더욱 깊이 찌르고 그 결과 죄인은 죽음에 이른다. 그 장치는 ‘장교’라고 불리는 익명의 인물에 의해 운행되는데, 그는 단순히 처형을 집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죄의 선고와 죄수의 몸에 새길 죄명의 선정까지도 홀로 관장한다. (정작 죄인은 자신의 몸에 새겨지는 죄명을 모른 채 죽어간다) 장교는 그 처형 장치와 상징적인 일체를 이루고 있는데, 자신의 직속 상관인 '사령관'이 교체된 이후에 그 장치와 자신의 입지에 심각한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처형 장치의 존속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서자 그 장교는 '정의로워라(Sei gerecht!)'라는 문구를 기입하고, 몸소 처형 장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문구가 새겨지기도 전에 그 장치는 오작동을 거듭하면서 해체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장교는 바늘에 관통되어 죽음에 이른다.


카프카의 유형지에 "Sei gerecht! (정의로워라)" 라는 신탁이 새겨져 있다면, 김상진의 유형지에는 "Jouissance(열락)"라는 신탁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카프카의 신탁이 실현시키는 것이 죄명을 새겨 죽이는 처형 장치라면, 작가의 신탁을 실현시키는 것은 기업 로고가 지워진 광고영상의 이미지이다. 한쪽은 정의를 다른 쪽은 열락을, 한쪽은 이름 새기기를 다른 쪽은 이름 지우기를 실행한다. 하지만 이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쌍을 이룬다. 실제로 카프카의 유형지에서 알몸으로 처형 장치 속으로 들어가 바늘에 관통당해서 죽는 장교의 '정의'는, 천사의 화살에 꽂혀 신성을 경험하는 테레사 수녀의 모습의 '열락'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 유형지에서 기업 로고가 제거된 영상 이미지가 모여서 이루는 열락은 무엇인 걸까? 그것은 아마도 죄명을 새겨서 죽인 죄수들을 한 구덩이에 차례차례 던져 넣으면서 장교가 느꼈던 제의적 쾌락의 극대치일 것이다. 지우는 일은 죽이는 일이기도 하다. 기업의 로고를 지우고/죽이고 정화된 영상 이미지를 'Jouissance'라는 기표의 홈통 속에 집어넣어 그것을 가득 채우는 일은 카프카의 소설에서 장교가 아련히 회상했던 바와 같이 유형지의 '열락'으로 성립될 수 있다. 이러한 '열락'에 이르렀을 때 작가의 유형지는 지나간 세계를 애도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제단(祭壇)과 같은 장소가 될 수 있을까? 





VI


<Jouissance>가 설치된 장소의 왼쪽 벽에는 하나의 영상이 투사되고 있다. 그것은 별로 크지 않아서 가까이 다가가서 감상해야 한다. 그것은 무인 로켓이 발사 직후에 폭발했던 사고를 인접한 장소에서 촬영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영상 속에는 우리가 이 글의 서두에 '실재'라고 불렀던 것들이 있다. 즉, 하늘로 솟아오르는 로켓이 있고, 스크린을 향해 들이닥치는 불길이 있다. 하지만 이 영상에 나타난 '실재'는 제시되자마자 우리에게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을 상실한다. 로켓은 창공에 닿기도 전에 폭발해버렸고, 스크린을 덮쳤던 불길은 우리가 있는 공간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한 채, 스크린 안쪽의 세계만을 거칠게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영상의 하단에는 'Camera is trembling after explosion but we are not'이란 자막이 뜬다. 


자막에 표기된 'we'는 누구인가? 언뜻 그것은 전시장에서 영상을 감상하고 있는 우리를 지칭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 영상은 팬데믹의 세계를 유비(類比)하고 있는 이 유형지에 적합하지 않은 작업이 된다. 이 장소는 실재의 난입이 스크린에 의해 차단되는 곳이 아니다. 변이하는 바이러스와 돌발하는 자연재해와 같은 팬데믹 시대의 실재는 스크린의 안팎을 가리지 않고 출몰하며, 우리는 어디에서나 안전하지 못하다. 즉 이 장소에서 우리는 'we'가 아니다. 


그렇다면 'we'는 누구인가? 일단 자막을 영상에 기입한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 존재는 실질적으로는 이 영상을 제작한 사람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자막으로 기입된 구문의 주체가 아니라, 단지 그 주체를 대행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실재가 모든 곳에 난입하는 팬데믹의 세계에서도 'but we are not'이라 말할 수 있는 주체는 누구일까?  



VII


카프카의 소설에서 'Sei gerecht! (정의로워라!)'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은 전임 사령관이다. 그는 유형지 전체를 설계한 사람이다. 그는 이미 죽었지만, 그가 내린 명령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의 명령을 '문자'로 전환시키는 처형 장치도 그가 부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작동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장교는 전임 사령관이 부여한 명령에 의거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한 사람이다. 장교에게 전임 사령관은 신적인 존재이고 그가 남긴 명령은 신탁처럼 절대적이다. 전임 사령관이 유형지에 부여한 질서는 신법(神法)과 다름없어서 원칙적으로 영속하는 것이며, 그 무엇에 의해서도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  


카프카의 소설에서 장교가 처한 딜레마는 유형지에 이미 부여되어 있는 절대적인 질서가 또 다른 절대적인 질서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장교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신임 사령관이다. 그는 전임 사령관과 마찬가지로 신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다. 장교는 그를 극도로 혐오하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입법적인 권력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장교는 신임 사령관이 새로운 명령을 내리기 전에 전임 사령관의 명령에 의거해서 자기 자신을 파쇄한다. 그런데 장교가 스스로를 지울 때, 전임 사령관이 설계한 처형 장치 또한 해체되어 버려 유형지에서는 열락(Jouissance)이 발생할 수 있는 질서의 공백이 생긴다.      


김상진의 유형지에서도 질서를 부과하는 존재는 질서를 부과하는 존재에 의해서만 상쇄되거나 대체될 수 있다. 변이하는 바이러스나 돌발하는 자연재해는 질서를 부과하는 존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 대신 이와 같은 물리적 실재의 돌출은 카프카의 소설에서 처형 장치가 일으키는 잦은 고장처럼 기존 질서의 기능을 저하시키고, 질서를 부과하는 존재의 주권을 약화시킨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물리적 실재는 기존의 질서를 무화시키거나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는 주체가 되지는 못한다. 



VIII


<Jouissance>와 <We are not>이 설치된 공간 사이에는 작은 방으로 연결된 입구가 있다. 그 방으로 들어서면 두 개의 십자(十字)가 중첩되어 있는 광경이 펼쳐진다. 하나는 기독교의 기호체계를 대표하는 십자고상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적인 계측의 기호 체계를 대표하는 전자 수평계의 십자선이다. 이 작업의 명칭은 ‘Crosscheck’로 각기 다른 질서를 상징하고 있는 두 개의 '십자(Cross)'가 서로를 '교차(Cross)'하면서 점검한다는 뜻이다. 한 질서의 유한성은 오로지 다른 질서에 의해서만 인지될 수 있으므로 두 개의 질서가 대등하게 중첩되어 서로를 검토하는 상황은 두 질서 모두의 임의성과 자의성을 노출시키는 결과를 빚는다. 작가는 여기에 일몰 영상을 전경(全景)으로 부여하여 이 광경에 담겨 있는 종장(終章)의 맥락을 부각시킨다. 


<Jouissance>의 우측에는 <Crosscheck>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공간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고, 초록색 전등으로 밝혀진 탁자가 있다. 발길이 먼저 닿는 곳은 탁자이다. 거기엔 텍스트가 하나 놓여 있는데, 공교롭게도 제목이 ‘Crosscheck’이다. 니체(F. W. Nietzsche)를 연상시키는 잠언적인 문체로 기술된 그 텍스트는 상당히 묵시록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간'의 종말을 예견하고 있는 그 텍스트는 ‘인간’을 ‘흔들리는 경계 그 자체’라고 규정하며, "당신은 이 흔들림을 느끼고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끝을 맺는다. 입법적인 문자들이 지배적인 김상진 작가의 유형지에서 제기된 ‘경계’와 ‘흔들림’에 대한 물음은 확실히 불경스럽다. 하지만 이 장소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입법적인 문자들의 소거와 부재이므로 이러한 물음은 이질적으로는 느껴져도 부적합해 보이지는 않는다. 

 


IX


이 유형지에서 마지막에 닿게 되는 공간의 명칭은 ‘Evil Residence (악마가 살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 들어서면 붉은 조명이 내린 라커룸이 나타난다. 캐비넷, 벤치, 거울의 배치가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특이해서 눈에 띄는 것은 캐비넷의 넘버링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661번에서 시작하고 있는데, 661, 662, 663... 이렇게 순차적으로 번호를 새어가다 보면 하나의 번호가 누락되어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그것은 666번이다. 이 같은 누락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주는 표식은 없다. 다만 ‘악마가 살고 있는 곳’이라는 명칭과 붉은 조명이 막연한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할 뿐이다. (물론 기독교적인 생활문화에 익숙한 사람은 그 숫자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적그리스도의 상징임을 쉽게 알 것이다) 


그러나 <I know this steak is no real>의 페니스와 마찬가지로 <Evil Residence>의 666번도 오히려 은폐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둘러싼 기호 체계 전체에 전복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Evil Residence’는, ‘God Residence' 즉 '신이 임재하는 곳'에 다름이 아니다. 이처럼 ‘악마’와 ‘신’이 공존하는 장소에서는 두 개의 십자가 중첩되는 것과 같은 ‘Crosscheck’의 상황이 발생한다. 실제로 <Evil Residence>가 설치된 공간의 한구석에서는 텍스트로 기술된 <Crosscheck>가 낭독되고 있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다가서 보면, 검은 전선의 뭉치 위에 작은 TV가 놓여 있다. 나지막한 독백의 음성은 전선 아래에서 새어 나오고, TV는 켜져 있지만 노이즈밖에 보이지 않는다. 


주파수를 상실하여 아무것도 표상하지 못하는 TV 화면은 이 전시에서 수차례 제시되었던 기표의 공백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그러나 이 공백은 앞선 경우와는 달리 흔들림을 동반하고 있다. 점멸하는 회색 입자로 이루어져 있는 그것은 응시할 수 있는 대상을 하나도 내어주지 않은 채 자기 앞에 서 있는 존재를 응시한다. 육체 없는 시선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그 시선은 전선의 뭉치 아래에서 새어 나오는 음성과 어울려 기묘한 신성함(혹은 불경함)을 형성하게 된다. 신의 음성(혹은 악마의 음성)이 울릴 때, 그것을 청취하는 자는 자신이 표적으로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음성이 말하는 바가 무엇이든 그것은 당위이자 명령이다. 설혹 그것이 제안이나 질문의 형식을 띨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공백 앞에 노출된 사람이 느끼게 되는 진정한 공포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존재가 신인지 악마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저 불투명한 노이즈의 뒤편에 숨겨져 있는 페니스가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한 채로 그 사람은 선택을 내려야 한다. 정말 불행한 일은 재난의 소용돌이 속으로 서서히 휘말려 들어가는 이 혼란한 시대에 신과 악마는 수시로 얼굴을 바꾸며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령을 지키든 어기든 그 사람은 징벌을 피할 수 없으며 아무리 지혜로운 선택을 한다 해도 그는 ‘신이 임재하는 곳(God Residence)’ 즉 ‘항구적 질서’에 정착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신이 임재하는 곳 자체가 어지럽게 명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 유일하게 허락된 것은 『유형지에서』의 장교처럼 ‘선악의 저편에서’ 흔들림의 열락 속에 파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 또한 새롭게 도래할 질서(혹은 신)에 대한 전망이 아닌, 노이즈로 가득찬 공백에서 새어 나오는 명령이다. 


 “당신은 이 흔들림을 느끼고 있는가?”


 질문을 가장한 그 음성은 ‘정의로워라!(Sei gerecht!)만큼이나 강제적인 자결의 지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