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공간, 아웃사이트 설치전경, 2018, 김기대
빈 공간
글_김상진
문제집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어느 것을 사야 할까. 늘 그랬듯이 명망 있는 시리즈들이 있었다. 소년은 붉은 형광 표지로 코팅된 문제집을 꺼내 들었다. 경시대회 준비생이나 최상위권 성적의 아이들이 푸는 것으로 잘 알려진 문제집이었다. 비록 그의 성적은 그렇지 못했지만, 소년은 그 문제집을 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도서관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마치 이미 우등생의 그것과 같았으나 결과는 모두의 예상 가능 범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꿈이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나의 경우, 소년들 대부분이 과학자를 꿈꾸던 그런 시절을 보냈다. 과학의 힘(로봇, 특히 변신 로봇)만이 끊임없이 침입해오는 악당들에게서 우리를 지킬 수 있었던 시절 마침 대규모 산업화에 들어간 이 나라는 이공계에 대한 강한 사회적 수요를 가지고 있었다. 빨갱이는 빨갱이였으므로 왈가왈부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들은 만화 속에서 늑대와 돼지로 변신할 뿐이었다. 군부정권의 한 대통령과 같은 성을 가지고 있던 어느 형제는 그 사실을 인상 쓰고 떠들어대며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쉬이 겁줄 수도 있었다. 물론 가끔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꿈은 먼 곳에 있는 ‘그림’ 같은 것이었고 사실 나는 꿈을 꾸는 것보다 욕망하는 것에 훨씬 익숙했다. 나는 친구들이 가지고 있던 빨간 색 제믹스가 가지고 싶어 몇 날 며칠을 가난한 부모를 졸라댔다. 아마, 디오게네스처럼, 자위하는 법을 조금 더 빨리 배웠더라면 그 게임기가 그렇게 가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광장에서의 자위를 마친 뒤 이렇게 말했다. 배고픔도 이렇게 해결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 꿈도. 게임기도.
어떤 청년은 놀랍게도 욕망하기 전에 더욱 간절히 바라는 것들 몇 가지를 알고 있었다. 그것들은 바란다고 이야기하기에도 머쓱한. 그러니까 ‘이미 벌어진 일들’ 에 가까웠다. 술 취한 채로 불어난 강에 휩쓸려 가던 그가 간절히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그의 폐는 그리고 입은 한 번의 들숨을 위해 이미 강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살기 위해 다시 숨을 멈추었던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니까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아마도 어떤 위상차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높고 멀거나, 가깝고 닿을 수 있거나, 미처 눈치채지 못하거나.
김기대에게 작업실이란 그러한 그의 바람들이 모두 들어있는 곳이었다. 작품이라는 높고 먼 그러나 어떤 것이 될지 모르는 어떤 꿈. 그 언젠가 만나게 될 꿈을 위해 그가 시험해보고 싶었던 수많은 재료와 공구들. 그리고 기본적인 신체적 요구들을 간소하게나마 충족시켜줄 수 있는 시설들(주방, 욕실, 침실 등). 손재주가 유난히 좋았던 그는 학교의 실기실보다는 원룸 대신 얻은 허름하고 대신 얼마나마 큰 지하 공간, 그가 끊임없이 구축하고 수리하던, 그의 작업실에 있기를 즐겼다. 그의 작업실은 그다지 곱지 않았지만 그의 바람들은 비교적 무리 없이 그 공간에서 정리되고 수용되고 있는 듯 보였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7개의 작업실을 매번 마지막이 될 것처럼 만들어 놓고는 부수고 다시 떠나야 했다. 그가 작업실을 주거공간과 분리한 것은 결혼을 하고도 좀 지나서였다. 그는 재수생일 때도 대학생일 때도 대기업 회사원일 때도 혹은 이런저런 요청들을 받고 남의 작업을 도와주며 지낼 때도 늘 작업실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많은, 혹은 부탁을 받아 그가 직접 제작한, 어떤 (때로는 놀라운) 형상들을 보아 왔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들은 적어도 그가 그동안 자신의 삶인 양 지어온 작업실의 사명에 걸맞지는 않은 것들이었다. 게다가 그는 또 새로운 작업실을 짓고 있었다. 이번 작업실이 완성된다면 그는 분명 이미 키우고 있는 피망 토마토 파프리카에 이어서 닭을 키우고 달걀까지 받아먹을 터였다. 어느 하루는 그의 작업실에서 작업 중 곤란한 상황에 닥친 내게 그는 어디선가 필요한 물건을 잽싸게 찾아 전해주고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 작업실에는 없는 거 없어.”
아마 그와 모르는 사이였다면 “이봐 이제 그 지독하게 비효율적인 짓은 그만둬. 작업실을 만들지 말고 작업을 만들라고.”라고 말했을 것이다. 사실은 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당신이 처음 작업실을 가지게 되었을 때의 그 온도, 그 냄새, 그 기분을 기억한다면. 그 꿈을 담은 공간을 기억한다면. 누군가는 처음 그의 작업실이 생겼을 때 그 좁은 공간을 끊임없이 서성거렸다. 또 서성거렸다. 그러면 곧 작업이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아니면 체 게바라 같은 영웅이 되고 싶은가? 꿈을 꾸자 하지만 처절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이렇게. 어떻게 적들을 효과적으로 분쇄할지- 점령한 지역을 어떻게 처리할 건지 - 영양가 있는 공모는 언제 뜨는지- 영양가 있는 전시는 - 어떤 영양가 있는 큐레이터가- 어떤 영양가 있는 배경을 가지고 - 모든 행위에 어떤 마일리지를 부여하는지 - 현실적으로, 이성적으로, 효율적으로. 만세.
누구나 노력하면 꿈은 이루어진다거나 어떤 꿈이든 동등한 가치가 있다는 등의 프레이즈는 사실 지독한 농담이다. 꿈은 우리를 태어나기도 전부터 어떤 경쟁의 구조 속에 등록시킨다. 단지 그 구조 속에서 이미지의 교체가 이루어졌을 따름이다.(과거에는 이렇게 많은 직업이 있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벼슬, 대학생, 과학자, 대통령, 군인, 민주투사, 위대한 발견, 연예인과 공무원, 스타미술가, 다른 수많은 형상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꿈꾸는 자리는 높은 경쟁을 만든다. 결국 다들 자신도 모르게 경주마가 되어있다. 그렇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지어져 있던 친절한 경마장 속이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꿈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들은 대게 누군가가 성공하고 누군가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마치 꿈의 다원주의처럼, 만약 모두가 노력해서 각각의 꿈을 이루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사실 그들을 올려다 보아줄 이들이 아무도 없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성공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은 모두에게 소비 가능한 꿈을 팔기 위한 새로운 프레임이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미디어를 가득 메운 유명인들과 잡다한 성공 스토리들은 어쩌면 계속해서 이러한 꿈을 팔고자 하는 자들의 음모 같은 광고들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 이미지들을 소비하며 다시금 꿈을 소비 가능한 형태로 불태우는 오늘의 우리들의 거대한 거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꿈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가 바라는 방향에 있지 않을지도 모르며 우리는 끊임없이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괴로워하며 꿈을 향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왜 그 곳으로 가야만 하는지를 묻고 싶다면 선조의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그리고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는가?)
그는 내가 무엇을 전시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자신의 작업실을 전시하겠다고 말했다. 끊임없이 지어온 그 바람의 상자를. 그러니까 나의 이 누추한 바람의 상자(전시장) 속에서. 그래 아무튼 그는 오늘 여기에 또 새로운 작업실을 짓기 시작한다. 당연하게도 그가 3주간 어떤 작업실을 전시장에 만들어 갈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오늘도 이것이 마지막인 양 그의 작업실을 만들어 나갈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지켜볼 것이고,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그러니까 그것이 철거되기 전날, 마주하게 될 어떤 풍경은 아마도 모두가 반복하지만 모두가 멈추지 않는 어떠한 ‘효율의 빈공간’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