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ngjoo Kim, A Teleportation Through Two Chairs, I Don’t Have a Problem with Berlin Because I’m Not Late Also I Am Invited, single channel video, 00:11:02
Hidden Grid
글_김상진
아마 사회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정상(normal)’을 향한 강렬한 욕구는 ‘이상함(abnormal)’을 가장 맛있게 먹는 법에 다를 바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정상(혹은 이상함)에 열광하는 법과 이상함(가끔은 정상)에 분노하는 법 그리고 그 모두를 소비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사회는 이것이 군중의 단위에서 벌어질 때 가능한 가장 큰 소비의 역사를 최근의 사회적 이슈들을 통해 경험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이 행위의 목적들은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쉽게 전도되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모든 것이 정상이었던 유토피아적 기억을 수복하기 위해(사실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었던) 그 이상함들에 그토록 열광해왔던 것인지, 혹은 그것을 빌미로 합법화된 가학(혹은 피학)의 쾌락적 가능성을 즐기기 위해 그 이상함들을 소리높여 외쳐왔던 것인지, 아니면 그것 외에는 스스로가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도저히 없었기에 그렇게 적들을 증오했었는지 등을 설명함에 깊은 곤란함을 느끼게 된다.
이 지속적 망각과 혼란 그리고 광신의 중심에 자리 잡은 부조리의 가능성은 알베르 까뮈가 말했던 “어머니의 장례식에 울지 않은 자가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과 같은 지층에 늘 존재한다. 어쩌면 정상이란 외부로부터 우리를 보호 받기 위해 쓰고 있는 집단적 가면(혹은 갑옷)이며 그 이상함에 대한 열정적인 소비(주로 미디어를 통한)만이 사실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그 갑옷의 무게를 정화하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 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중심잡기 테스트를 위해 발로 차이던 신기한 사족보행 로봇(Boston Dynamics사가 제작한)을 본 사람들이 흔히 가졌던 ‘안타까운 분노(연민의 대상이 부재하여 더더욱)’는 이와 같은 소비의 정당성을 근거할 실체의 확인이 대단히 곤란함을 우리에게 다시 떠올리게 해준다.
여기, ‘정상’을 위한 격자에 포개어 신자유주의의 모든 생산 활동의 픽셀화(pixelize)된 효율이 촘촘한 올무처럼 우리를 조여오는 21세기의 어느 초입 즈음에서 이 전시 Hidden Grid 에 모인 세 작가는 각자의 ‘숨겨진 격자’를 꺼내놓는다. 그들은 마치 당신들의 평화를 크게 개의치 않는 ‘내부자’와 ‘방관자’ 그리고 ‘돈키호테’와도 같다.
혜화동의 어느 반지하, 지표면으로부터 어중간한 높이에서 열리는 이 공간(전시가 점유한)은 일종의 전시의 폐허이며 제도의 허점이다. 이정형은 예술이라는 연금술의 내부적 목격자(혹은 밀고자)로서 전시라는 임시적 환영을 진행의 형태에서 멈추어 놓고 이를 통해 전시공간이 제도로서 작동되는 것을 잠시 유예시킨다. 천정을 한껏 가리고 낮춘 거대한 보양지 비닐과 그 속에 담겨 있는 한없이 부드러운 빛들은 하나의 임시적 환영(이전 전시)이 다음 임시적 환영(다음 전시)으로 넘어가지 못한 채 멈추어 버린 어떤 장면이다. 그런 이유로 공간은 어쩐지 전시와 전시의 중간에 머물러 버린다. 게다가 익살스럽게도 관객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그렇게도 낮은 천정의 경계 위로 머리를 내밀어 볼 수도 있는데 그 풍경은 이 ‘비정상’적 공간 속에서 ‘전시’ 였던 풍경을 만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렇듯 정지된 공간 속에서 장종완은 늘 그렇듯이 유쾌하고 불길한 노래를 부른다. 한 면의 벽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화면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대한 입이 살고 있는 저택, 비열한 바비들의 웨딩, 파도치는 지구본, 계속해서 한숨 쉬는 동물” 등은 각기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숙취, 네가(너만) 믿는 세계, 방송을 메운 오디션 프로그램, 권력이 숨어 살고 있는 집(법원, 종교의 집들, 방송국 등등)”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감들을 반복되는 현악 음에 한껏 담아 보낸다. 이 냉소적 방관자는 어리석은 믿음의 숲을 배회하고 있는 이가 절대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것과 거대한 입(끊임없이 ‘정상’을 일깨워주는)의 비밀스러운 존재 사실을 슬그머니 그리고 때로 뻔뻔스럽게 늘어놓는다. 굴러가는 도토리의 (빡신) 표정은 일상이라는 두꺼운 메이크업(부조리에 대한 망각을 위한) 밑에 숨어있는 오늘의 초상이다.
공간 속에 널어 놓은 이 ‘이상함’을 위한 양식들은 김방주의 신나고 괴랄한 영상작업에서 특이점을 찍는다. 순간이라는 개념은 실사용적으로 긴 순간, 짧은 순간, 길지도 짧지도 않은 순간, 짧다면 짧은 순간,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순간, 시작되지도 못한 순간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어느 순간이 얼마 만큼의 구체적 시간의 단위로 환원되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혹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환산이 없다). 작가는 이 순간에 대한 수학적(절댓값으로서) 정의가 모호한 점을 이용하여 ‘순간이동’의 정의를 ‘순간이동’에 대한 처절한 연민이 들 때까지 늘어트려 버린다. (이때, 이 ‘순간’의 길이는 그의 예술가로서의 ‘일상적 생활’의 그것만큼이나 길어 보인다.) ‘순간이동’을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베를린의 전시장으로 땅에 발을 딛지 않고 이동하는 이 행위 예술가는 이를 통해 정상에 대한 드넓은 확장 가능성과 비정상으로의 초근접성을 동시에 쟁취한다. (그것 역시 예술가의 그것과 흡사하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전시라는 제도와 일상의 희망에 대한 믿음 그리고 언어(혹은 예술)에 대한 자기 확신은 이곳의 은밀한 격자 위에서 그네와도 같이 끊임없이 흔들거린다. 그리고 ‘이상함’의 정상에 포획된 당신들에게 세 작가는 그들만의 ‘이상함의 이상함(abnormal)’을 즐기는 더욱 은밀한 방식들을 제시한다. 모든 선명함과 정의로움과 희망이라는 믿음에 대한 두려움이 절실히 필요한 21세기의 어느 초입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