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Ⅱ, Ⅲ
글_김상진
Ⅰ, Ⅱ, Ⅲ 은 흔히 타이틀의 챕터(혹은 구식 강령을 위한)를 나눌 때 사용하곤 하는 로마 숫자이지만 나와 백현주 작가의 전시 속에서 그것들은 아무것도 이름 붙여 지지 않는 혼돈의 사태(언젠가 태곳적에 한 번 정도 존재했던)를 저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불러보기’로 기능한다. 백현주 작가는 그것을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응 으응 으으응 따위로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아마 그것은 ‘최소한’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업 Thursday Cycle(2016~17)은 한 남성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소각되는 과정을 덤덤히 담고 간다. 흔히 고독사라 부르는 그 외로운 죽음의 흔적(또한 생명의 흔적)들은 폐기품과 판매 용품으로 이름 붙여져 효율적으로 제거되어진다. 남은 것은 아마 이름짓기로도 약품으로도 지워지지 못한 약간의 체취 정도 일 것이다. 나의 작업 Jack(2017)은 동일 선상에서 Thursday Cycle 의 역방향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기계의 측량 면 위에 새겨진 Jack이라는 이름(기호)은 저울 위에 아무런 질량을 남겨두지 않는다.(그것은 측량 시스템 자체에 각인되었으므로) 그리고 마치 바벨탑처럼 쌓여진 저울들은(사실 우편물 측량저울이다) 자신의 위에 올려진 시스템의 무게를 끊임없이 확장해 나간다. 그러니까 그것은 쭉쭉 뻗어 나가는 잭의 콩나무이다. 사람들은 그 나무의 끝자락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산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거위는 목요일에 사라진 한 남자의 흔적, 그 맞은 편 끝자락에 있는 상상이다.
결국 이번 전시 속에서 우리는 이름 붙임이 제거해나가는 것들과 확장(혹은 생성)시켜나가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것들은 젊은이의 손이 어느 날 쪼글쪼글해진 것을 발견하는 것처럼, 겨울이 오면 외투를 꺼내입는 것처럼, 거리에서 만난 어떤 이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것처럼 그저 이루어지는 어떤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전시는 질문하지 않는 삶과 질문 되지 않는 연속성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어떤 호기로운 웅얼거림(마치 응 으응 으으응처럼)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