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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fort distance 영상 퍼포먼스, 00:05:12,아웃사이트 설치 전경, 고길숙,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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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fort Distance 

 

_김상진

 

고길숙의 작업은 일상의 인간관계 속에서 침묵 되는(혹은 침묵 되기를 원하는) 어떤 은폐된 보편성을 노출시킨다. 진행되는 퍼포먼스의 서사 속에서 드러나는 그것의 형태는 일정한 지점에서 고통으로 응결된다. 그리고 이것은 드러난 표현으로서의 고통이 아닌 관계의 항구적 전제로서의 고통이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고통은 단지 극적인 절규나 슬픔, 분노 등만으로는 대변되어 없으며 기쁨 곁에 항시 존재하고 침묵하는 것이다. (물론, 고통의 곁에서 침묵하는 것은 기쁨이 것이다) 사실 일상의 자연스러운 관계들은(정상적 범주의) 문화적, 사회적으로 정당화된 위상 차의 미묘한, 때로는 적극적인 폭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물리적 폭력 혹은 폭언 등과 같이 명백한 폭력의 기호 분류(게다가 이것의 위법성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상이하다) 등록되지 못한 수많은 권력과 폭력의 구조들은 정상의 범주에서 일반적 관계양식에 내재되어 진다. 이러한 양식의 관습적 반복은 대부분의 이들이 구조를 본연의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지만 어떤 이들(예를 들면, 이방인의 뫼르소 같은)에게 이것은 폭력은 없었지만, 고통은 존재하는 시간으로 경험되어진다.  

 

이러한 작업들은 고길숙이 자신의 실제 인간관계 속에서 느껴진 (권력 혹은 감정) 구조들을 퍼포먼스의 스크립트로 도식화하면서 시작되는데, 대부분 출연자간의 관계는 물리적 매개체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으며 행위의 도식은 보통 일방 혹은 쌍방으로 불편함(혹은 사소한 고통) 일으키는 과정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도식의 구성은 전적으로 작가의 주관적 해석과 은유로 이루어질 뿐이지만 이러한 과정은 고길숙이 관계 속에서 발견된 자신을 객체화시킴으로서 어느정도 정당화되어진다. unnecessary offering II 에서 작가는 무표정하게 식물을 정성껏 관리하고 스스럼없이 직접 섭취한다. 그리고 식물은 뜯겨져 나간다. 이것은 자신이 단순히 관계의 희생자로서의 주인공이 아닌 재현된 도식의 에이전트임을 선언하는 지점이며, 에이전트 간의 관계(서사성이 제거되어져버린) 상호적 폭력(고통) 교환이 일상적 전제임을 선언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의 도식은, 전극에 의해 반복해서 다리를 움직이는 실험실의 개구리처럼, 행위로부터 은폐된 고통의 보편성을 하나의 자극으로 추상화한다.

 

그녀의 작품 관계의 구조는 어딘가 유명한 Marina Abramović & Ulay 초기작들과 유사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고길숙의 작업은 위대한 선배들의 형이상학적 드라마의 대척점에 위치한다. 아름답고 잘생긴 서구의 엘리트들이 이끌어내는 행위구조의 극적인(마치 고전주의와도 같은) 도상화는 고길숙의 작업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작업은 주변화 되어진 생활형 CCTV(혹은 블랙박스) 느낌에 가깝다. 스크립트를 수행하는 출연자들은 매혹적인 앵글로 조명되어지지 않는 일반인 혹은 이방인(게다가 동양인) 뿐이며 게다가 그들의 동작과 표정은 무심하다 못해 어색해 보인다. 그들은 충실히 움직이지만 사실 사연 없는 기계처럼 수행한다. 그러니까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기계들은 선행자들의 작업처럼 훌륭히 공격하거나 방어하지 않는다. 그저 일상적으로 작동할 뿐이다. 그것으로 중앙집권적 계몽 신화의 구축과 은폐되어진 주변화의 대조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그녀의 작업으로부터, 망각되어졌던 고통들을 혹은 고통이라 불리워지지 못한 어떤 감정들을 상상하는 일은 작품 관계의 당사자가 아닌 관람자의 몫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