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뀨르와 타르 개인전: RRRRRRRRRRRRRRRRR.., 아웃사이트 설치전경, 2020



Why So serious
글 / 김상진

 

이 세상은 당연함으로 가득 차 있다. 덕택에 운 좋게도 우리는 그 당위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축복을 누린다. 생각해보라 아무것도 당연하지 않은 세상을. 무질서와 혼돈, 파괴와 알 수 없는 기이함이 하늘 가득한 세계를. 분명 그 곳은 당신이 살고 싶은 세상은 아닐 것이다. 당연함은 아무것도 없음의 지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당연함을 지키기 위해 당위의 존립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적으로 또는 재앙으로 간주해왔다.

 

허나 그 명백한 당연함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원체 당연함이란 끝이 보이지 않는 양파 껍질과도 같아서 한 가지의 당연함을 위해서는 또 다른 당연함이 근거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 당연함의 시비를 가리는 게임은 예로부터 몇 가지 형태로 진행되고는 하였는데 보통 끝없이 반복되는 당연함의 나열에 지치고 질려 나가떨어지거나, 당연함의 당연함을 한 두 겹쯤에서 적당히 잘라 당연함을 위한 당연함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거나 혹은 그 텅 빈 속내를 눈치채고도 차마 그것을 벗어날 용기가 없음을(다시 말해 초인이 될 수 없음을) 한탄하고는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명한 이들은 이 어리석은(비효율적인) 놀이에 집착하지 않는다. 당위는 내버려 두면 스스로 증식하게 마련이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굳이 가르지 않는 것은 당연함이라는(끝없이 공허를 채워주는)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바라보며 현실이란 안식을 쉬이 얻을 수 있는 방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혹은 다행히도 당연함은 미어터질 듯 가득 차 있어 당위의 공허를 논하기도 전에 서로 다른 당연함들은 대립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현실은 매번 대립하며 그 뒤로 당연함들의 갈등이 시작된다. 더 강한 당연함이 더 약한 당연함을 제압하고 그날의 당연함이라는 가장 정의로운 독선의 타이틀을 거머쥔다. 마녀는 열광하는 사람들 가운데 불타오르고 방을 가득 채운 유대인들은 가스실에서 쓰러져가며 몰락한 팔레스타인에는 미사일이 쏟아져 내린다. 결국, 제물 없는 당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런 비극을 피하고자 당연함들은 때로 타협을 통해 두리뭉실한 당연함 혹은 임시적 교착상태를 이어가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그런 당연하고 당연하지 않은 온갖 당연함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때때로 그저 당연하지 않음을 표현하기를 혹은 그것을 몰래 경험하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간절히 욕망하는지도 모른다.

 

예술​1은 얼핏 당연하지 않은 어떤 것을 보인다. 그 독창성과 새로움과 화려한 변주들. 그것을 둘러싼 몇몇 고행의 신화들 - 밥 대신 가난을 먹고 술과 예술을 동시에 마시다 의도치 않게 예술을 팔아 빌어먹는 자들의 순교자가 되어 오늘날 통속적 예술의 성전을 수호하는 근대의 유령들 - 이 끊임없이 이야기 되어진다. 그리하여 최소한 예술이 대중에게 낯설게 작동하는 동안은 그것은 그들에게 적어도 신비한 숭고의 세계이거나 아니면 예술에 적당히 부정적인 이들에게도 조그마한 어떤 유별남으로서의 다름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름의 매력은 끝없이 당연한 지루함을 잠시 탈출하고자 하는 수많은 이들을 위한 예술의 수요를 창출해 낸다. 

 

하지만 예술의 내부에서 말하건데 오늘날의 예술은 어떤 지독한 당연함 속에 갇혀있다. 그것은 예술의 당위성을 의심하는 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단계에 진입하였음을 의미하며 패턴화된 아방가르드의 늘어진 긴장감이 더 이상 예술 내부에 롱기누스의 창을 겨눌 수 없음을 그리고 새로운 전위적 시도의 대부분이 통속적 제도 아카데미즘​2에 귀속되었음을 표상한다. 조지 딕키는 그의 제도론적 예술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예술에서 새로움을 찾는 아우성이 넘치는 오늘날에서라면, 창조성에 대한 이와 같은 장애물​3은 더는 존재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지만 오늘날의 제도는 예술을 부정하는 대부분의 전위적 충동을 제도적 계급과 그에 따른 보상의 체계로 유인하여 결국 그 충동이 제도의 당위적 언어로 변역 되어지도록 유도하고야 만다4.

 

그렇다. 오늘날의 예술은 제도적 관성의 늪에 깊숙이 빠져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는 딱히 누군가를 혹은 어느 집단을 비난하기 위해 밝혀야 하는 비밀은 아닐 것이다. 다만 당연함에 맞설 당연함의 부재를 표현하는 혹은 새로움의 당연함에 너무나 익숙해져 더 이상 새로움이 새롭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짧은 탄식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혹시 이 예술이란 근사한 언표는 그리기나 만들기와 같은 근원적 충동을 끊임없이 억누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물론 그 충동이 예술 이전에는 어떤 언표의 제약 속에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작가 김동규는 2019년부터 주간 창작이라는 채널을 만들고 미술 유튜버로 활동해왔다. 이 채널을 이끌어나가는 ‘뀨르와 타르’는 김동규의 1인 2역에 의해 결성된 셀프미술듀오로서 미술인 ‘뀨르’와 비 미술 생명체(고무 공룡) ‘타르’는 순수미술(제도)과 순수창작(의지)의 간극 사이에서 발생하는 여러 현실적 질문들을 술방, 먹방, 미술 드라마, 전시소개 등의 다양한 에피소드로 엮어내어 왔다. 그러나 이미 유튜브를 스스로의 예술 매체로 사용하는 예술가들이 늘어가고 있으며 예술은 계속해서 대지 미술, 웹아트 등의 신생 매체를 매번 쉬이 흡수해 왔으므로 엘리트 미술인인 그가 진행하는 유튜브 쇼가 예술 제도의 완전한 바깥에 위치한다고 말하는 일은 어불성설일 수도 있다. 하나의 낯선(일탈) 행위는 총체적 익숙함이란 시간을 늘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5. 하지만 그 경계를 타고 흐르며 제도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그의 시도는 하나의 현재적 가능성 혹은 의지의 표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는 미술계와 유튜브라는 경계선에서 발언해왔던 ‘뀨르와 타르’의 이야기이자 제도적 미술에 몰두해온 미술계에 던지는 그들의 메시지이다. 뀨르는 오랜 기간 버려진 장식적 목적의 그림들을 수집해왔다. 주거지 쓰레기장에 종종 버려져 있던 그 그림들은 애초에 제도권에 존재한 적 없었던 키치적 시뮬라크라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제도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좌표적 정의를 뒤샹의 소변기와 공유하지만 어떤 평범한 이들에게 잠시나마 예술적 감상의 대상이었다는 점을 달리한다. 그러니 키치라고 불리는 이 회화들은 사실 보통의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무겁고 비싼 제도 예술의 신화가 만들어낸 작은 토템인 셈이다. 거대한 신을 믿던 작은 신을 믿던, 금 바가지에 물을 마시던 해골바가지에 물을 마시던, 확신이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 공통된 충동과 보상이 존재한다. 그 확신이 어떤 이유로든 길바닥에 버려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기 아웃사이트라는 허름한 제도권의 전시장 A룸 안에는 근사한 제도 예술 혹은 아트 페어의 미니어처로서 또 하나의 잘 차려진 전시장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 걸려진 작은 토템들은 당연한 예술로서 혹은 당연한 예술인 척 걸려있다. 그런데 그 앞의 작은 키오스크를 누르면 타르는 거침없이 자유분방하게 갓 데뷔한 그 예술들을 26가지의 이야기로 던져버린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사실 오늘날 제도 예술이 질문 받아 응당한 여러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들을 관객이 그저 웃음으로 흘려버리지 말기를 진지하게 제안해 본다)


B룸의 뀨르는 금 바가지와 해골바가지 사이에서 늘 흔들리는 고뇌 형 캐릭터(예술형 배트맨)이다. 그래서 그는 한없이 귀엽고 낙천적인 속세의 공룡 타르의 변증법적 타자이며 대자적 존재이다. 그래서 술방을 빙자한 그의 독백은 예술가의 울며 웃는 신세 한탄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그의 작업이 죽어감을 두려워하며 작업실에서 살아 날뛰던 그의 작가로서의 쾌(창작의 엑스터시)가 전시라는 제도가 마련한 장례식을 통해 우아하게 죽어가는 것을, 쾌를 즐기던 스테이지(작업실)가 장례식 후 초라하게 돌아온 시체(작품)들의 안치소가 되어가는 것을 목격하였음을 고백한다. 그에게 술병 앞에 놓인 한 바가지의 양장피에 걸려있는 예술은 꽤나 대단한 것이어서 미술사의 위인들처럼 세상을 바꾸지 못함을 슬퍼하고 10만 년뒤의 예술의 존재를 걱정하며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이제 뀨르의 제안대로 저 그림들은 하나씩 제목을 지어준 관객에게로 넘어갈 것이고 그래서 이 질문들도 온전히 관객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필요한 것은 더 이상 날 선 갑론을박이 아니라 그저 미술관에 걸려진 훌륭한 작품들을 볼 때마다 이곳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시 편안히 기억해 보는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당신이 뀨르의 불안에 전염되었다면 우리의 행복 니코틴 타르는 분명 걸쭉한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Why so serious!!” 

 

그렇다. 당연한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하는 것은 쓸데없는 불안장애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야 할 이유도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름지기 하늘을 무너트리려는 자는 그 정도 걱정은 하고 살아야 하는 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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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 속에서 예술이라는 단어는 18세기 beaux art 로부터 비로소 근거지어진 오늘날의 순수예술(fine art) 즉 제도 미술을 의미한다. 
2  …창조적 활동은 형식의 아주 작은 세부에서 묘기를 부리는 일로 국한되고 이보다 큰 문제들은 과거의 거장들이라는 선례에 의해 결정이 된다. 똑같은 테마들이 수많은 작품에서 기계적으로 변주되지만 새로운 것은 하나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 클레멘트 그린버그 : 아방가르드와 키치
3  예술은 정의될 수 없으며 예술에 대한 어떤 정의가 예술을 질식시킬지도 모른다는 모리스 웨이츠의 주장 
4  과거 어느 작가가 말했던 ‘벤츠 타기 위해 자본주의를 까는 작가들’ 이라는 표현은 이런 전위적 충동과 제도적 보상의 매끄럽지 못한 관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아서 단토는 어떤 것을 예술로 보는 데에는, 눈으로 마주치지 못하는 무언가가, 즉 예술 이론이라는 배경, 예술사에 대한 지식, 다시 말해 예술계가 필요하다 라고 말했다.




Why So Serious 

Text by Sangjin Kim (out_sight)


 

The world is full of the legitimates. Thanks to this, we luckily enjoy the life of the world of the obvious. Imagine a world where nothing is appropriate; a world with a sky full of disorder, chaos, destruction, and unknown bizarreness. You may not want to live in such a world. Legitimacy protects us from the hell of nothingness. And we have considered everything that threatens the existence of such propriety as disasters, for the sake of the legitimates.

  

However, where the apparent appropriateness had begun is hidden under a veil. Legitimacy is like a layer of onion skins that peel off endlessly. A legitimacy requires another legitimacy to base itself on. This game, distinguishing the legitimate and the non, has been continued in several different forms for a long time: usually, one gets fed up by the ceaselessly repeated list of the legitimates; one cuts off one or two coats of the appropriateness and use them to justify a legitimacy for a legitimacy; or one laments their lack of courage (that they cannot be an Übermensch) to discard such legitimacy even after realising how hollow the appropriateness is. However, most of the wise ones are not obsessed with this silly (inefficient) game. The legitimate would proliferate on its own when left alone, and by not killing this goose laying golden eggs, one could easily take sanctuary in the so-called reality while looking into oneself reflected on the mirror called the legitimate (which unlimitedly fills the emptiness).

 

But, unfortunately, or fortunately, since legitimacy is stuffed to bursting, all the different appropriateness begin to confront each other before we get to discuss the emptiness of the legitimates. Therefore, reality always opposes, followed by the conflicts of the obviousnesses. A stronger validity subdues weaker validities and wins the self-righteous title called the justice of the day. A witch burns at stake in the middle of fanatical people, a room full of Jews fall in gas chambers, and missiles pour down to fallen Palestine. After all, a legitimacy without a sacrificial victim does not exist. Of course, to avoid such tragedies, legitimateness maintains temporary deadlocks or vagueness through compromises. Thus our lives are densely packed with such appropriate or inappropriate legitimacies. Perhaps we are desiring to simply express the non-legitimate or to experience it deep inside our hearts secretly.

 

Art1, in a glimpse, presents what is not apparent. The originality and the novelty, and their variations. Some ascetic myths surrounding them-about ghosts of the modernity who guard the sanctuary of the conventional art of today, those who eat poverty instead of meals, drinking art with liquor and then suddenly, unexpectedly selling art to become a martyr of the beggars-are perpetually told. Therefore, at least while art remains unfamiliar to the mass, it is a mystic world of the sublime or somewhat persists its difference as a bit special one to the rather hostile audience of art. And this charm of being different creates demand for art from those who wish to escape the boredom of the bottomless legitimateness.

 

However, speaking from inside the art, art today is stuck in a dreadful legitimacy. It means that art has entered the stage where no one doubts the rightfulness of art. Also, it represents the fact that the sagged tension of the patterned Avant-garde cannot aim the Lance of Longinus into the art, and that most of the radical attempts have been vested in the conventional institution of the Academism2 . George Dickie, defending the rightfulness of his institutional theory, insisted that “in today’s clamour looking for something new in art, such obstacle to creativity3 no longer exists”. Though, today’s institution, instead of denying the art, lures most of the radical urges into the institutional class and the system of class-oriented compensation and therefore let the urges be translated into the legitimate language of the system4.

 

Right. Today’s art seems it fell deep inside the swamp of institutional inertia. Yet it may not be a secret to unveil to criticise somebody or a group. It is but a short lament regretting the fact that novelty is not new anymore because we are so accustomed to the new legitimates, or the legitimates that represent the absence of the new legitimate against the legitimates. So we need to reconsider whether this splendid term ‘art’ is suppressing our basic desire to draw or to make. (Of course, we have no clue if any other term before art had suppressed those basic urges.)

 

Artist Dongkyu Kim has presented himself as an art Youtuber via his channel Weekly Create since 2019. The host of the channel, Kkyurr & Tarr, is a self-duo organised by the artist playing two parts: the artist ‘Kkyurr’ and the non-artistic creature (rubber dinosaur) ‘Tarr’. They have been broadcasting various episodes responding to practical questions aroused from the gap between the stance of the two, in forms of Soolbang (drinking show), Mukbang (eating show), art dramas, exhibition reviews, and others. Since there is a growing number of artists who use Youtube as their media, and also because art has been easily absorbing new media such as land art and web art, it seems somewhat illogical to say that the Youtube show hosted by Kim, the elite artist, stands entirely outside the art’s institution. An unfamiliar act (deviation) always presupposes the time of wholesome familiarity5. Still, his attempt to flow along the threshold and not to settle inside the institution could be considered a possibility of the present, or a representation of the will.


This exhibition is a story of ‘Kkyurr and Tarr’ who has been speaking on the border of the art world and the world of Youtube, their message to the art world immersed in the institutional art. Kkyurr has been collecting abandoned decorative artworks for a long time. Those paintings left out on the residential dumping grounds are kitsch simulacra that have never existed inside the institution of art. They somehow share a point of definition with Duchamp’s urinal in terms that they both exist outside the institution. However, the paintings are different from the urinal because the paintings had been aesthetically appreciated by some ordinary people at least for a short time. So, in a way, these paintings, the kitsch, are small totems created by the myth of the expensive and weighty institutional art that have been merely accessible to the ordinary people. Whether you believe in the weighty god or the small god, whether you drink water in a golden bowl or in a bowl of skull, if it is convicting, then there must be a common desire and reward in it. At least before that conviction gets discarded on the waste bin for some reason.

 

Here, at a humble institution of art called out_sight, room A is presented as a neat showroom like a miniature of an art fair. And here, the petty totems are hung as (if) they are legitimate art. But as you press a button on the kiosk in front of them, Tarr, without a hitch, throw those newly debuted art into 26 stories. And, in fact, the stories indicate various directions of questions that the institutional art of today deserves. (Therefore, dear audience, I sincerely recommend not to think of them as mere laughable stories.)

 

In room B, Kkyurr is presented as a character of agony (Batman of Art) who withers in between a golden bowl and a bowl that is a skull. Thus he is the dialectical other, the reflection of the rubber dinosaur Tarr, the cute, the sanguine, and the secular one. So in a way, his monologue in the disguise of Soolbang looks more like an artist’s blues, a lament in which he cries and laughs. He confesses that he witnessed graceful deaths of his sensation of being an artist (ecstasy of creation) which once had throbbed in his studio. He confesses that he witnessed how the stage of that sensation (the studio) had become a mortuary of his art that had returned dead from funerals. For him, the art, hung over the bowl of the noodle dish next to a bottle of liquor, is quite a big deal. So he regrets that he cannot change the world like those heroes of the art history, anxiously worries about the being of art in hundred thousand years.

 

Now, the paintings will be handed over to the audiences who entitle them, as Kkyurr suggested. And therefore, these questions will also wholly be handed over to the audiences. And here, we don’t need another intense battle; all we need to do is comfortably remembering what has happened here whenever we visit galleries to see those neat artworks. However, if you are already infected to Kkyurs anxiety, I am pretty sure that our happy nicotine Tarr would say in his husky voice,

 

“Why so serious!”

 

Yes, it must be anxiety disorder if you are worried about the sky falling on you. And there is no reason to live in such a way. But, you know, one who is determined to win the sky must live with concern as such.


 

Translated by Jinho Lim(out_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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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rt’ in this text means fine art, or the institutional art, that had been defined since the 18th century as beaux art. 
2  …and in which creative activity dwindles to virtuosity in the small details of form, all larger questions being decided by the precedent of the old masters. The same themes are mechanically varied in a hundred different works, and yet nothing new is produced… - Clement greenberg Avant-Garde and Kitsch
3  Morris Weitz claimed that art cannot be defined and that definitions of art might suffocate art.  
4  An artist once referred to ‘artists who criticize Capitalism to buy themselves Mercedes’ to reveal such uncomfortable relationship between the radical drives and the institutional rewards. 
 “To see something as art requires something the eye cannot descry-an atmosphere of artistic theory, a knowledge of the history of art: an art world,” said Arthur Dan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