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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ing for Face, 아웃사이트 전시 포스터, 2020, 최윤석  


얼굴을 기다리며 
글_김상진(out_sight, 디렉터)


  예술과 싸우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명분을 천명하고 고귀한 예술이 암암리에 강요해온 가치와 논리의 부조리함을 논하는 것(많은 작가, 큐레이터, 비평가들이 주로 선택해온)은 익숙한 고전이다. 다만 제도적 위기(혹은 가치의 위기)라고 지칭되어지는 이 스릴러물들의 결말은 매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범인(예술)을 또 범인이라고 지적할 따름이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혹은 회를 거듭할수록) 점차 줄어드는 긴장감은 점점 더 극의 몰입을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과거와 달리 오늘날의 반예술은 제도적 위기라는 블록버스터의 주연 위치에서 내려와 동시대의 다원주의가 제시하는 취향과 장르물의 사이를 서성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왜 예술과 아직도 싸워야 하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그이는 필경 예술과 평생 달뜬(혹은 너무 엄숙한) 연애 만을 해본 자이거나 난공불락의 예술을 보며 그 권위와 능청스러움에 일찍이 좌절한(혹은 굴복한) 이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예술은 계속해서 절을 올려야 하는 신전이 아니라, 때가 되면 싸워줘야 제맛인 살아있는 인공물이다. 그러니 적당한 때가 되면 이렇게 말해도 좋다. 오빠(반예술)가 돌아왔다고.


  예술을 고발했으나 예술은 더 융성해졌으므로(게다가 매번의 고발 사유를 자신의 새로운 알리바이로 전환해가며) 아마도 그 반예술주의자들은 사실 친 예술주의에 다름이 아닐 터이다. (게다가 그들은 반예술로 수여된 예술의 훈장을 자랑스럽게 받아 가곤 한다) 하지만 본디 반예술은 깃발을 든 친 예술주의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무엇인가 당연한 듯 되어버린 예술(그러니까 정지된 예술)을 움직이려는 모든 다양한 충동에서 비롯되는 어떤 것이다. 혹은 정지된 예술이 늘어놓는 지루한 깊이를 견디지 못해 벌어지는 무의식적 탈주극인지도 모른다. 충동은 마음속 어딘가에서 살며시 밀려온다. 갑자기 - 예술에 불경하라!(별 이유도 없이) 더 나아가 - 반예술에도 불경하라!(결국 예술이므로) 마지막으로는 또 너(예술)와 너(반예술)로 매번 반복되는 핑퐁 게임에도 불경하라!(지루한 우리를 즐겁게 하라!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마찬가지로 최윤석의 충동은 애초에 제도나 예술 같은 거대 담론의 층위에 있지 않다. 대신 그의 충동은 예술이 구축한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에 대한 본능적 반발이며 기존의 예술과 반예술 모두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또 다른 반예술적 충동의 영역에 기거한다. 그래서 그가 일상을 사용하는 방식은 예술의 구원(동시에 대중의 구원)을 위해 일상을 심오한 예술과 결합시키려 했던 아방가르드의 비장함과는 전혀 다른 층위에서 벌어진다. 오히려 최윤석은 예술의 형식과 제도적 층위에 올려진 그의 일상성(가치 없음)을 올려놓고 그것이 유도해내는 어떤 예술 공백의 사태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얼핏 텅 비어 있어 보이는 그의 작업들은 예술을 둘러싼 계몽적 가치체계의 무게를 점차 중화한다. 


  끊임없이 일상을 미술의 제도 속으로 가져다 놓고 그것들에게 매번 예술의 전형적 깊이만을 부여해온 이들은 어떤 면에서 예술이라는 유리 진열장을 채우기 위해 일상을 박제하는 이들과도 같다. 일상은 제도적 깊이와 사상의 무게가 그에 미처 다 스며들지 않았을 때 비로소 일상 본연의 생기를 가진다. 다시 말하자면 일상은 위대하고 견고한 가치의 구조물들 사이에 펼쳐진 수많은 틈새이며 모두가 알지만 지도에는 없는 흔한 오솔길 같은 것이다. 또한 그런 연유로 저 규율(효율)과 명분의 태양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는 작고 귀한 그늘(사생활)이다.(그래서 아마 일상은 아름다운 것만은 아닐 테지만 또한 신비한 것이다) 따라서 박제되지 않은 일상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예술의 깊이와 구조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칠 수밖에 없는 얕음과 유연함을 가져야 한다. 작가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작가는 예술과 공존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이러한 일상 혹은 일상성을 예술 위에 능청스런 표정으로 턱 하니 올려놓는다​1. 예술과 일상 둘 중 하나는 부정되어져야 할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경계 위로 관객을 끌고 온 작가는 그동안 더 큰 무게를 위해 일상을 전유해온 선행자들의 축적된 전형성을 페이크모션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뭔가 익숙하지만 계속해서 기대를 엇나가는 허무한 플롯들은 예술의 지나친 진지함 속에서 그가 ‘일상’의 ‘일상적 무게’를 지탱하게 해주는 중요한 회피의 장치(일종의 패러디)들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마치 예측 가능한 예술적 결과(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를 기대하는 모든 관객들을 실망시키기로 작정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 연속되는 서사의 미끄러짐은 진지하고 무거운 예술이 당연한 듯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비워 서서히 거대한 여백으로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동안 최윤석의 작업에서 그의 얼굴은 그의 일상을 대변해 왔으며 평균보다 훨씬 일상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그의 얼굴은 그간 작업 속에서 가장 상징적 지분을 차지 해왔다. 작가 스스로가 작업 퍼포먼스의 주인공이자 그 일상의 실제 모델이므로 그의 얼굴은 그러한 도식에 어울리는 예술가의 진지한 수행성과 깨달음을 담지하고 있기를 관객으로부터 기대받는다. 하지만 그의 지나치게 일상적 얼굴(그리고 표정)은 마치 한국전쟁 통에 장동건과 원빈이 구두닦이 형제로 등장하는 것 이상으로 예술의 현실감을 떨어트린다. 그래서 이때 그의 얼굴은 예술의 미묘한 그리고 자학적 거울로 작동을 시작한다. 뒤샹이 모나리자(예술)를 남창으로 만들어 고전적 반예술의 기치를 세웠다면 최윤석은 자신의 얼굴을(도저히 예술이 될 것 같지 않은 표정과 함께) 예술로 만들어 모나리자와 뒤샹 모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혹자는 이를 예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의 작업의 본질은 지루한 조회 시간에 근엄한 교장 선생님을 흉내내어 웃음을 안겨주던 유쾌한 친구의 충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숨조이는 내부에서 우리는 늘 창문 밖을 바라보려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예술의 근엄함과 비예술의 비장함 모두 그의 얼굴 앞에서는 허탈한 웃음의 소재가 된다. 


  근 10년간 얼굴로 작업을 해왔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얼굴로 작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매너리즘을 느낀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다시 새로운 얼굴을 기다린다. 빈번히 사용되어 싫증이 난 자신의 얼굴을 갱신하려는 그의 이러한 행보는 예술이 반예술적 충동을 통해 매번 기대해온 새로운 예술을 떠오르게 만든다. 언급하였듯이 그의 얼굴(일상)은 예술의 거울이다. 따라서 새로운 얼굴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분명 새로운 예술을 갈망하는 우리의 모습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울에게 묻는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구의 얼굴이 제일 아름다우니? 현명한 거울은 이렇게 답했다. 



“아 얼굴을 가지고 뭘 해본다고 했는데 잘 안 되었고 

결국은 얼굴을 지우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 작가노트 중



예를 들면 그의 초기작 ‘모성을 위한 노래’(a song for maternity, 2014)에서는 모성과 예술형식 사이에 던져진 날 것으로서의 일상(엄마가 해준 밥차려먹기)이 기존의 예술이 가져오던 능숙한 결과에 익숙한 모든 이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Waiting For A Face

Text by Sangjin Kim(out_sight)



  There are many ways to fight art. It is classic to declare meanings or to argue how the value and logic secretly forced by the noble art are absurd (and many artists, curators, critics, have chosen to do so). However, as those thriller dramas called crisis of system (or crisis of value) have always ended accusing the same old criminal (art), as time went on (or say, the episodes went on), the tension of the thriller has lowered, and now we find it more and more challenging to focus. Therefore, today’s anti-art, unlike those of the past, has stepped down from the leading role of the blockbuster, crisis of system, and it wanders around all varieties of tastes and genres presented by the contemporary pluralism. 


If someone asks, nevertheless, why we still need to fight art, then I would assume that the questioner has only ever just kindled relationships (or had too solemn relationships) with art, or has already been frustrated (surrendered) by the authority and the wiliness of impregnable art. However, art is not a temple that we have to bow before. Rather, it is a living artifact that awaits a fight once in due time. So, it is okay to say when the time is ripe, ‘I, the anti-art, is back.’ 


Art has been accused, but art is ever more thriving (and, moreover, it takes the reason of its accusation as the alibi). So, perhaps, anti-artists are not too different from artists with views of pro-art. (They even take pride in their anti-artness badges.) However, anti-art cannot be flagged as a property by the pro-artists. Instead, it is something that derives from all variety of drives to move and shake the art that became to look obvious (in other words, art that is stock-still). Or, perhaps, it is a subconscious escape to run from the boring depth of the static art. The drive furtively emerges from somewhere in our minds. Suddenly - profane the art (for no reason)! Furthermore - profane the anti-art, too (as it is still an art)! And lastly, profane the ping-pong game of the continued You (art) and You (anti-art) (entertain us who are bored! Then that shall be enough!)!


Likewise, Yoonsuk Choi’s drive is not found on the level of big discourses, such as system and art, to begin with. Instead, his drive is an instinctive resistance against art’s solemn and heavy atmosphere and resides in the territory of the anti-artistic drives that make fun of both old arts and old anti-arts. So, he uses everyday life on a level far from the heroic Avant-garde, which had attempted to merge the mundane with the seriousness of art for the salvation of art (and for the salvation of the people). On the contrary, Yoonsuk Choi locates his mundaneness (valuelessness) on the level of art’s style and system, and enjoys a state of art’s vacancy induced by the juxtaposition. And there, the seemingly empty works of Choi gradually neutralize the heaviness of the enlightening value system around art. 


Constantly bringing back the mundane into art’s system to force on them the typical depth of art is, in a way, alike freezing the mundane to fill art’s vitrine. The ordinary remains lively with its natural energy when the deepness of the system and the heaviness of ideas have not thoroughly permeated yet. In other words, the ordinary is like the many crevices among sturdy structures of great values, and it is like those narrow trails that everyone knows yet are not marked on the map. Also, for that reason, it is a small and precious shade (privacy) where one can hide from the sun of discipline (efficiency) and reason. (And for that, perhaps, the mundane is not only beautiful, but it is also mysterious). So the ordinary, which is not yet stuffed into taxidermy, has to be shallow and flexible, so it can constantly run from the depth of art and its structure (like oil and water). The artist is well aware of that. 


The artist cheekily puts the mundane over art, even when the two seem impossible to coexist1. Leading the audience towards a precarious border where it seems either art or the mundane needs to be negated, he takes the typicality of the ordinary, appropriated by his antecessors who pursued heaviness, as a fake motion. Here, the vain plots of his works, somehow familiar but slipping away from expectations, function as a device for escape (a sort of parody) that enables him to stand the ‘daily weight’ of the ‘everyday life’ in art’s excessive seriousness. So, it is as if his works are determined to disappoint all the audiences who expect predictable artistic results (either good or bad). However, the continuous slipping of narratives in his works hollows the space where the serious and weighty art has been occupying and slowly turns it into a huge void. 


The artist’s face in his works has represented his daily life, and the face, which is expressed in a way that highlights his ordinariness far beyond the average, has been the most symbolic in his practice. Since the artist himself is the leading performer of his performance and the real-life model of his daily life, it is expected that his face stands for the artist’s serious performativity and enlightenment that suit such a structure. However, his way-too-ordinary face (and its expression) disrupts art’s sense of reality, as if Donggun Jang and Won bin are starring as shoeshiners during the Korean War in a movie. And here, his face starts to function as a subtle and masochistic mirror of art. As Duchamp made Mona Lisa (or art) a male prostitute, Yoonsuk Choi makes his face (with its utterly unarty expression) art, baffling both Mona Lisa and Duchamp. Someone might take it as a serious challenge to art, but in fact, it is not too different from the urge that drives a class clown to mock the serious school principal during his boring morning speech. It is because we always strive to look outside the window from the suffocating inside. For this reason, the solemnity of art and seriousness of nonart all become sources of futile laughter in front of his face. 


The artist, facing a mannerism with the fact that he will still be working with the same old face after ten years of working with the face, still waits for another face in this exhibition. His attempt to renew his face that he grew tired of reminds of any new art that has always been anticipated by art with anti-artistic drives. As mentioned before, his face (his mundane life) is a mirror of his art. Therefore, the artist awaiting a new face represents ourselves waiting for new art. So here, we ask the mirror. Mirror mirror on the wall, who’s the fairest of them all? And the wise mirror answered as such: 


“Well, I tried to do something with my face, but I failed, so I am trying to tell a story about erasing the face.” (From Yoonsuk Choi’s note) 




Translated by Jinho Lim(out_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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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r example, in his early work ‘a song for maternity (2014)’, an ordinary event (eating a mom-made meal) as it is, in between a maternal care and a style of art, perplexes everyone who are expecting artful results delivered by the usual ar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