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fab34db2c8db0ebedee6d0d907195f_1569385553_1273.jpg 

Air purifier 

air purifier, real flowers, water, glass frame, 180*100*80cm, 2011



긁어 부스럼 관하여 

               

나는 흔하게 우리가 현실에서 대상에 대해 가지게 되는 굳은 믿음들이 대단히 독단적이며 필연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그것은 미시적 혹은 거시적으로 관계를 바라보았을 어느 대상에게서나 발견될 있는 현실의 구조적 결함이겠지만, 다시 대상과의 관계를 일상적으로 조정했을 나는 믿음이 충만한(혹은 해야만 하는) 현실로 돌아와, 내가 발견한 그것들은 공연한긁어 부스럼이었을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면 유명한 박테리아 학자(Bonnie Bassler같은) 유명한 Ted 강연으로부터 사실 인간의 체내에 존재하는 세포 90% 이상이 ‘10 되는 박테리아들의 유기적 집합체(인간 세포는 1 )이며 실질적으로 그들의 활동에 의해 인간의 생명 활동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 우리에게 그것은 대단한 충격이며 마치 그런 과정들에 근거한 새로운 생명윤리 혹은 질서라도 만들어야 같은 기분이 들곤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나친 미시적 경험 혹은 스스로를 타자화시킨 객관적 사실로부터 우리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마도 정도는 음식을 먹고 볼일을 보며 박테리아들이 영양분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라든가 그들이 만들어 낸다는 화학적 반응을 통한 대화방식을 궁금해할지도 모르겠지만 미시적 현상이 지시하는 현실에서의 많은 오류들은 조금 거시적 현실이 가져다주는 상대적 편리함에 의해 잊혀지게 된다. 아마 며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건강을 위해 유산균을 많이 섭취해야겠다는 생각정도일까. 생명의 최소단위이므로, 생명인 박테리아 몇조 마리의 생과 사는 가시적 범위에 안에 있는 어떤 작은 생명체 하나만큼도 생명윤리의 논란 혹은 죄의식에 개입되지 못한다. 분명 현미경을 통해 바라본 백옥같은 피부가 실제로는 여타의 검붉은 피부와 크게 다르지 않거나 지저분하다고 해도 보통은 백옥같은 피부를 가지기를 원할 것이다.

 

시간에 대한 작업이었던  Time_watch sound(시간 _시계 소리) 또한 다르지 않다. 모두가 딱히 불만 없이 받아들이는현재라는 시간적 관념에 대한 굳은 믿음을 0.00001초의 정도의 차이를 문제 삼아 개념적 불안정성을 확대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의도적긁어 부스럼 된다. 그것은 어떤 이들에게 흥미롭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공격적인 이야기가 것이다. 향기와 악취가 분명히 구별되며 그곳에 우열 (미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가치가 존재한다는 일상적 믿음 또한 향기에 대한 작업인 Air Purifier에서는 다른긁어 부스럼으로서 트집 잡힌다. 어떤 이들에게 이것은 잔혹하고 비극적인 현상이며 향기라는 소중한 가치에 대한 학살행위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내게 향기라는 것은누워서 하늘 위에 금긋기같은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들은 내가 미술이라는 양식 위에 올려놓은 사소한 문제 제기일 뿐이다.  

 

 

언제나 이런 문제 혹은 모순적 구조들은 대상과 크기를 달리할 집단과 사회,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 모든 곳에서균열 되어 발견되곤 하지만 사라져 버린다. 홉수되어 버린다. 어김없이 망각되어지고, 설명되어지고, 가려진다. 그리고 잠시동안 드러났던 현실 뒤의 현실은 다시 묵묵히 돌아가는 거대한 가치의 톱니바퀴 뒤로 사라지며 돌리며 한없이 투명해진다. 해결된 것은 없지만 분란은  수습되었고 다시 삶은 진행된다. 그래서 불안정한 현실에 대한 굳은 믿음은 분명 독단적이고 비논리적인 것들 투성이지만 그들은 끝없이 강인한 항상성과 환각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균열도 흡수해낼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긁어 부스럼이라는 표현은 표면적으로 나의 문제 제기의 부질없음이나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이며 내면적으로는 이러한 행위의 반복들을 통해 스스로를 잠식하는 한없는 무력함에 대한 이중적 표현이 된다. 이러한 나의 행위는 오류(균열) 기념비적인 기록행위(혹은 유희 행위)들의 반복이다. 혹은 어리석음의 반복일까? 그렇지만 가지 확실한 것은 지점에서의 나의 트집 잡기들은 단지 현실이 독단적이고 필연적이지 않음을 비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게는 그렇게 보이겠지만) 나는 오히려 이것들이 현실과 그에 대한 믿음의 초월적 생명력에 관한 역설적 증명이며 관찰이기를 바란다(그저 작가의 희망 사항이겠지만). 그리고 아마 사소한 오류의 기록들은 그저 부스럼처럼 이곳에 한동안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