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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ch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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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check

 

시대는 매번 이런저런 것들을 갈망해왔지만
사람들은 시대적 희망이 그들의 갈망이 부정하는 것들로 인해 

굳건히 성립할 있었다는 점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사실 신의 시대가 필요로 했던 것은
신에 대한 불경이었으며
또한 그에 따르는 정화과정(응당한 처벌과 전쟁 그리고 저주)이었다

 

 

마찬가지로 신이 약속한 세계 또한
단테의 촘촘하게 언어화된 신화적 지옥으로부터 영생을 얻었다

 

경계 외부의 훌륭한 구축은
내부의 견고한 구축을 암암리에 보증한다

 

외부는 언제나 두려움이고 공포이며 경외이고 숭배이다.


하지만 외부가 데이터의 네트워크로 촘촘히 봉인된 오늘날
이것은 단순한 혐오와 호기심이라는 손쉬운 쾌락적 접근(클릭) 형태로 나타난다

오늘날 클릭은 가장 명백한 환원의 단위이다

 

경계는 만리장성을 쌓듯 만들어진 내부적 설계(혹은 선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계의 면은 언제나 어김없이 외부와 닿아있기 때문이다

 

다만 언제나 외부는 내부자의 시선에서만 존재할 있다는 것도 기억하도록 하자

 

오늘날의 경우 갈망(혹은 갈망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수학적(경제적 혹은 과학적) 환원 가능성이 되었으며 

따라서 필요하지 않은 것은 불확실성이 되었다

 

여전히 무언가 남아있다고 생각해보려 하지만
돌아보면 끝없는 바다도, 높은 하늘도, 굽이치는 산맥도, 멈추지 않는 강도 

그저 계측되고 가공과 거래가 가능한 자원이 되어 있다

이것들은 개발의 자원으로 때론 환경 보존(그것 또한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위한) 자원으로도 존재한다

자연뿐이겠는가

 

아이들의 가장 환한 웃음 또한 기업 이미지 광고의 주요 자원이다

 

우리의 모성(부성) 사랑, 행복과 슬픔, 우울과 고통, 질투와 같은 고결 하고 신비했던 감정들 

또한

 호르몬과 도파민(세로토닌) 그리고 영역별 효용 가치라든가 

비타민d결핍, 사회 심리적 결과물이나 위자료, 합의금 등으로 환원된다

이제 서로의 낯선 질감을 느끼는 일은 시대착오적 유물이 되었다

 

도구의 세계(숫자의 세계)
자신들의 불확실성(전통적 신앙과 감정 그리고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양식체계) 위해 

충실히 봉사할 것이라 믿었던 근대의 순진한 열망은
환원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모든 불확실성이
다시 도구를 위한 도구로 환원되어 가는
오늘날을 예측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풍경은 이러하다

저기 사람이 걸어간다. 보라 자원이 이동한다

저기 사람이 고기를 먹는다. 보라 자원이 자원을 먹는다

저기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

보라 다시 자원이 자원을 먹는다

 

하지만 사람을 그리 불러서는 아니 된다.
존엄한 인간이 자원이라는 사실은 자연권의 선언과
노예제의 폐지 이후로 언제나 은폐되어야 하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따라서 자원 과잉의 사태는 실업률 증가와 국제경기 저하로
자원 부족의 사태는 출산율 저하와 급속한 노령화 등의 기호들로 

대체된 채로만 이야기되어야 한다

 

인간의 실제적(인간이 인간 외부의 총체를 함몰시킨 수학적) 가치는


세계 경제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엑셀 파일 속의 숫자를 통해,

소셜 네크워크의 클릭 수에 의해, 새없이 교환되는 네모난 프레임 속의 이미지들을 통해,

스마트워치가 알려주는 당신의 심박 수와 혈압를 통해, 꿈을 즉각적 가치로 교환하는 TV 오디션 프로를 통해

 

무수히 수많은 층위에서 없이 교환된다


그리하여 심지어 이상 환원될 것이 남지 않았다고 여겨질 때조차
시장의 치열한 경쟁은 모든 환원의 단위를 미시화하거나 거시화하여 환원 영역을 확장시켜 나간다

 

 

이상 외부는 숭고하지 않아 보인다.

그것들은 이제 온통 얇디얇은 디스플레이 패널 위에 올려져 있는 소비재일 뿐이다

 

하지만 소비될 대로 소비되어 어떤 치명적 긴장도 주지 못하는 

싱거운 환원 물만이 반복되더라도 여전히 그에 대한 수요는 끊이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은폐된 갈망의 양태이다

역설적으로 압도적 환원(확률) 사막에서 사람들이 진정 갈증하고 있는 것은
사라져 버린 외부(포획되지 않은 불확실성)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부분 자신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겠지만)

 

그러나 고통을 최소화하고 쾌락을 극대화하는 일은 

근대 이후의 최대의 공리주의적 사명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여전히 의식 너머의 갈망을 채우기 위해
양지에서 길러진 편리한 예술과 키치적 유사-환원물의 세계(미디어) 열광한다

 

 

언제나 가장 부정되는 것은 심연에서 가장 갈망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은밀한 욕망의 새로운 뮤즈는 소비되고 소비되어
닳고 닳아버린 매끈매끈함만이 남은 낡은 외부(안전하게 훈육된) 재림이 아니다

이미 사람들은 그것들이 어떻게 패배해왔는지를 목격해왔다

 

그래서인지 이제 충동과 흔들림은 견고한 내부의 내부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당연한 것을 부정하려는 몰이해적 충동에서 시작한다.
당연한 것이 흔들리는 (병신)같은 기쁨에서 시작한다.
당연한 것의 갈라진 사이로 덜렁거리는 부조리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보라 때로 충동은 

부정을 부정하는 부정한 부정이 부정하고 부정되는 

그런 어떤 인과율 너머의 사태를 원하는 듯하다

 

거기에는 왜라는 것이 존재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그저 거대한 결핍이 만들어낸 공백의 인력에 끌어당겨진 낯선 메시지들인 것이다

 

조목조목 끝까지 논리적으로 투쟁하는 (서로의 정합을 겨루는 ) 

새롭게 틔어 나는 새로운 외부(내부의 흔들림) 충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내부적 환원의 태도이다.


중요한 것은 당연함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다.


저들의 예측의 체계를 교란 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춤추지만 미동이 없으며 노래하지만 고요한 환원의 시뮬레이션을 

조금씩 조금씩 파산 시켜 새로운 메시아의 태동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충동과 흔들림은 일원적 도구를 파괴하는 일원적 도구,
전통적 구도를 취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도구 속에서 태어난

 

 도구 아닌 도구 - 도구인 하는 도구 - 도구를 모르는 도구 - 도구스러운 도구 - 도구 없는 도구

 

등으로서 새로운 방식의 생존을 모색한다.

 

 

충동은 어디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오직 상대성에 의해서만 발현된다

그래서 사실 이것은 기존의 내부와 외부를 정신없이 넘나든다

 

중요한 것은 예측을 무너트리는 것이며
방식이나 규율은 중요하지 않다.


때문에 중간에 비틀기, 어쨌든 태연한 척하기, 그냥 끝내기 등은 

새로운 충동의 유효한 주요 전략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새로운 메시아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사실 진부한 내부적 예언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고도 끝내 나타나지 못한 이유도 그러하다.

 

 

이제 오래된 외부는 내부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새로운 외부를 향한 충동은 이미 비대해진 내부를
새로운 외부로, 자신을 새로운 내부로 지정한다.


끓기 시작한 냄비 바닥에서 간헐적으로 솟아오르는 공기 방울 마냥 

산발적 작은 무질서들이 점차 새로운 내부를 증식시킨다

 

따라서 본래의 환원적 내부는 점차 단테의 지옥보다 훨씬 거대하고
촘촘한 데이터로 구축 되어진 새로운 외부(당연함 그리고 지루함의 지옥)으로서 스스로의 기능을 바꾸어 간다.
(
이미 현재의 네트워크는 지구적 파놉티콘의 완성형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 않은가)

 

이제 도구는 우리에게 이상 도구가 아닌 자연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숫자 속에서 태어나 숫자 속에서 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우리의 새로운 자연이 것이다

 

인간이 만든 평행의 자연 속에서 인간은 소실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한동안 신의 자리를 차지해온 존엄한 인간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신이 죽어도. 인간이 죽어도

위대한 발명 들의 몰락 후에도(그들이 나타나기 전에도 그러하였듯이

삶은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이러한 상대적 혼란의 상황과 당신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가 내부에 속하는지 외부에 속하는지는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혹은 인간이라 불리우는 무엇은 

언제나 흔들리는 경계에 있는 무엇이며

혹은 흔들리는 경계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점에서 당신에게 필요한 한가지 질문은 이것이 된다

 

 

 


당신은 흔들림을 느끼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