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등 


(2016년 아마도 목하진행을 위해 쓰여진 단편영화시나리오 - 소설식구성)
 

 

# 2

 

병원 대기실 벽에 걸린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긴 복도를 가진 낡은 3층 상가 건물의 2층 중간쯤에 자리 잡은 이 병원은 개발 열풍이 불지 못한 수도권에 위치한 그런 흔한 병원들처럼 구식의 실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신식인 물건은 최근 구입한 듯 보이는 자동 혈압계 정도로 보였는데 대기실의 어색한 침묵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간호사의 키보드 치는 소리가 불협화음 같은 리듬을 만들어 냈다. 색이 바랜 알루미늄 등기구에 끼워진 기다란 형광등 몇 개도 창이 없는 대기실을 밝히고 있었다. 

 

대기실은, 역시 여느 영세한 개인 병원들처럼, 길고 좁았으며 긴 환자 대기용 쇼파가 길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구조였다. 여자는 맞은 편 쇼파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지 않았지만, 낯선 곳에서 보통 그러하듯이, 그의 움직임을 간헐적으로 의식하고 있었다. 20분 전쯤 진료실에서 나온 남자는 간호사와 몇 마디를 나누고 다시 자리에 돌아가서 앉았다. 그는 잠시동안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미동없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곧 중얼거리며 자그마한 약통에서 약을 덜어 물과 함께 삼켰다. 남자는 줄곳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아무튼 여자는 그의 정면에서 어느 정도 비켜나 앉아 있음을 안도했다. 그리고 남자는 다시 고장난 장치처럼 묵묵히 앉아 천천히 눈을 꿈벅거릴 뿐이었다. 

 

 

 

# 3

 

남자는 조금씩 그의 몸이 소파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름 편안하게 앉아 있다고 생각했던 그의 골반과 허리는 더 중력을 거스르지 않는 모양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알아차리기에는 지극히 미세한 움직임 이었지만 그 스스로는 근육과 관절들의 조정 관계를 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조금 뒤 그는 중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초침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거나 너무 크게 들렸다. 눈앞에 있는 것들은 꽃이 피었다 지는 것처럼 아련해지다가 곧 선명해졌다. 익숙해지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리는 법이었다. 지옥에서 떠올라 풍경을 내려다보는 밤처럼 알 수 없는 향기가 그윽했다. 그것이 사라질 무렵 그는 더 이상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리들은 여전히 선명했지만, 점점 멀어져갔다. 남아있는 정직한 느낌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약간의 갈증 이외엔 없었다. 둔탁해진 모든 것들이 그를 정적의 태막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남자를 고요하고 평온하게 만들었다.  

 

 

# 6 

 

이번엔 남자의 얼굴에 피가 조금 튀었다. 볼과 콧잔등에 따뜻함이 잠시 느껴졌지만, 곧 사라졌다. 미간을 조금 찌푸려야겠다고 느꼈지만 다른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눈이 건조했기 때문에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격렬하게 움직이는 장면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드러나곤 했다. 남자는 그러고 보면 그 때도 많이 안 좋았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 -13

 

20대 어느 날의 남자는 3일째 잠을 자지 않았고 술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하지만 술을 마셔도 그는 취한다는 느낌을 거의 가질 수 없었다. 친구들과 소주를 여러 병 마신 뒤 약간 호흡이 가빠오고 얼굴이 조금 화끈거렸지만 그는 여전히 잘 걸을 수 있었으며 길에서 마주친 누구도 그를 취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경주로 차를 몰았다. 2시간 정도의 거리였지만 운전하는 그를 방해했던 것은 종종 터져 나오는 눈물이 시야를 조금 가렸던 것뿐이었다. 그는 운전하면서 분명 무엇인가를 초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해야만 하게 만드는 어떤 영광이 쉴새 없이 머리속을 더 맑게 만들어 주었다. 그간의 일에 대한 죄의식과 그가 앞으로 그녀에게 바칠 헌신을 위한 열정은 심장 깊숙한 곳에서 용암처럼 뿜어져 나와 그때마다 목젖 깊은 곳이 한없이 아려왔다. 운전하는 동안 한적한 지방 국도의 가로등이 눈물에 번져 성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결국, 그는 그 양가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갓길에 승합차를 세운채 결코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 -12

 

역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겠다고 문자를 남기고 그는 길 건너의 편의점에서 치약과 칫솔 그리고 비누를 골랐다. 지난 3일간 씻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엉겨붙었을 머리가 걱정되어 작은 젤도 하나 구입했다. 편의점에서 나오자 막 동이 트고 있었다. 짙은 주황빛이 어둠 뒤에 숨어있던 자그마한 지방 도시 시내의 윤곽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는 듯이 쏟아져 나왔다.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남자는 역사 안의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면대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이 조금 차갑게 느껴졌지만 그는 구석구석 비누칠을 한 뒤 뽀득한 느낌이 손에 남을 때까지 얼굴을 여러 차례 부볐다. 그리고 세면대 수챗구멍 위에 만들어진 물 소용돌이를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이를 부지런히 닦았고 수건이 없었으므로 젖은 얼굴을 말리는 동안 거울을 보며 외모를 점검했다.

 

남자는 곧 자신의 얼굴이 굉장히 초췌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썩 괜찮은 표정을 지어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 얼굴은 그의 초월적 감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독히 비루한 모습이었다. 다시 시도를 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어디인지 미세하게 뒤틀린, 목표한 표정에는 가깝지만, 결국은 기괴하고 빈곤한 얼굴만이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보던 그는 확실히 저 기괴한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를 아주 닮아서 어딘가 어색한 남자와 그는 계속 표정을 교환했다.   

 

 

# 4

 

남자는 그러한 회상을 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방금 전 대기실에 들어온 중년 남자의, 어딘가의 구식 샐러리맨 같은, 소매가 옆으로 펑퍼짐하게 퍼진 흰색 반팔 셔츠가 눈에 띄었다. 그는 차분히 걸어들어와 중년 여자의 곁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여자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를 보자 많이 놀란 듯 했지만 곧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나지막이 터트렸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는 동안 남자는 차근차근히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남자는 남편이거나 혹은 정부로 보였다. 간호사도 그 작은 소란에 그들을 흘끔 보았지만 더 이상 개입하지는 않았다. 남자는 여전히 소리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조금 광적인 기독교 신자인 듯 했고 박 목사라는 사람을 만나러 의정부 단식원에 다녀왔다는 것 같았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타이핑 소리가 멈추고 예약변경을 확인하는 간호사의 예의 바르지만 짜증 섞인 목소리가 저들의 대화를 덮어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 들을 꽤 자세히 들을 수 있었지만, 그것들은 우박처럼 그의 마음으로 요란하고 산란하게 쏟아져 들어갔기 때문에 딱히 해독 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간호사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중년 남자의 점점 높아지는 저음의 목소리 그리고 강박적인 시계초침소리가 버무러져 만들어낸 타자들의 웅성거림이 피곤하고 난잡하게 느껴졌다. 그는 지금의 평온함을 최대한 유지해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상념은 다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 -40

 

누구나 한번은 그랬듯이 남자는 그때 국민학교 저학년이었다. 그러니까 소년이라고 하기엔 좀 어린 편에 속하는 10살 남짓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사업에 실패하고 피신한 아버지를 몇 년간 볼 수 없었다. 그는 매일 아버지를 간절히 기다렸다. 멋진 와이셔츠를 입은 아버지가 어느날, 예전의 어렴풋한 기억에 그랬듯, 선물을 잔뜩 가지고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를 괴롭히던 이 낯선 동네의 아이들에게도 멋진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온 그를 보여줄 수 있으리라.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니 좁디좁은 집구석 한편에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그는 아들을 보고 웃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그 여유 있고 부유한 미소를 짓지 못했다. 그는 마치 궁지에 몰린 작고 고약한 짐승 같아 보였다. 그는 집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잘못들에 크게 화를 내곤 했다. 그 얼마간 활기찼던 소년은 말수가 없어지고 조금씩 주눅 들어갔다. 얼마 뒤 소년이 어떤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날(아마도 오락실에서 잡혔던 날 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소년을 세워놓고 세상의 잘못을 모두 그가 저지른 것처럼 비난했다. 소년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렀다. 그리고 훈계와 호통 한 가락이 끝날 때마다 종아리나 허벅지에 매질을 했다. 소년은 울며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그는 정확히 자신이 납득될만큼의 매질을 한 후에 소년을 풀어주었다. 소년은 당연히 쓰러져 잠들어야할 만큼 울었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41

 

새벽, 소년은 조용히 방을 나왔다. 다용도실 문틈으로 미약한 빛들이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소년은 지독한 슬픔으로 격앙되어 있었다. 그가 그를 배신한 만큼 그도 그를 슬프게 하고 싶었다. 소년은 어두운 부엌으로 들어가 싱크대 장의 문을 열고 칼꽃이에 걸려있는 다양한 크기의 부엌칼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중 가장 큰 칼을 꺼내 배꼽을 향해 대보았다. 티셔츠 위로 날카롭고 뾰족한 날 끝이 파고 들었지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자세로 소년은 미동 없이 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좀 흐른 뒤 그는 양손으로 다잡은 칼자루를 당겨 조금씩 칼을 안쪽으로 밀어 넣어 보았다. 그리고 더 집어넣으면 자신을 둘러싼 얇은 막이 찢어질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지점에서 멈추었다. 그는 그 남자가 후회하기를 바랬다. 뱃가죽이 찢어진 소년을 보며 자신이 소년을 너무나 사랑했음을(이전에 그러했듯이) 기억해내고 슬퍼하기를 원했다. 칼의 첨단이 배꼽을 조금씩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저주와 사랑과 연민의 상상들이 소년의 머리속을 헤집는 동안 마침내 소년의 머리속에서 아버지는 슬픔과 비통함에 목을 놓아 울고 있었다. 소년은 그 구슬픈 장면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울음을 터트렸다. 그의 끊임없는 상상 속에서 한 사람씩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러니까 마지막엔 어머니도 누나도 할머니도 모두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고 소년은 문득 모두에게 사랑받는 법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배꼽이 아려왔다.    

 

 

 

# 5

 

간호사는 몇 번이나 예약 가능 시간을 확인해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중년 여자와 그 남자는 여전히 대화 중이었다. 여자는 여전히 바닥을 보고 흐느끼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주로 중년 남자가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남자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작아졌지만 잘 들렸다. 그는 증오와 용서에 대해 그 목사와 나눈 이야기를 여자에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증오는 용서와 크게 다를 것이 없으며 그러므로 자신들이 처한 상황 또한 그 선택에 영향을 받지 않을거 라고 말했다.   

 

 

흐느끼는 여자를 잠시 바라보다 그는 들고 온 작은 백팩에서 종이에 싸여진 물건을 천천히 꺼냈다. 드러난 칼자루 위로 날을 싸고 있는 종이는 찬송가의 악보 같아 보였다. 중년 남자는 몸을 돌려 고개 숙인 여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드러난 칼날을 차분하고 단호하게 그녀의 옆구리에 밀어 넣었다. 그는 분명 영화 우나기의 야마시타보다 지금을 잘 준비한 남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여자의 비명소리가 공간을 날카롭게 채우자 조금 더 속도를 올려 팔을 움직였다. 몇 번의 칼날이 여자의 갈비뼈 사이를 들락거리자 여자는 곧 조용해졌다. 처음에는 말리려고 뛰어나왔던 간호사는 경련만이 남은 여자의 몸을 바라보며 잠시 정신을 잃은 듯 자리에 주저앉아 기괴한 소리를 질러대었다. 언어라기보다는 소리에 가까웠겠지만, 신의 은총을 구하려는 소리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중년 남자는 곧 별 망설임 없이 간호사에게로 다가갔다. 상가 앞 가로수에서 울고 있는 매미소리가 어렴풋이 들리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 -11

 

남자는 큰 병원의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경주를 다녀온 지 대충 보름 정도 지났을 것이다. 대기실의 환자들은 보통 보호자와 함께 있었는데 다행히 소리를 지르거나 난동을 피우는 자는 없었다. 단지 무엇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자들의 초점 없는 응시와 소소하고 이해할 수 없는 중얼거림들이 대기실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었다. 매미 소리가 햇빛만큼 강렬한 여름이었다. 꽤 거대하고 오래된 이 콘크리트 건물의 내부는 창밖의 눈부심과 대조적으로 음습하고 조용했다. 높은 천정에 달아놓은 몇 개의 형광등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듯 했다. 그는 대기실에 앉아 여름 볕이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출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사람들 그곳을 분주히 지나쳤다. 이곳에서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도 잘 웃지 않는 것 같았다. 

 

# -10 

 

화장기 없는 여의사는 남자의 간증과도 같은 고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진료실은 대기실처럼 높은 천장을 가지고 있었고 커다란 창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에 철제 책상에 앉아있는 의사는 옅은 역광의 그늘 속에 숨어 있었다. 남자는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동정을 구했지만, 역광과 지독히 평범해 보이는 안경 뒤에서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차갑다는 느낌조차 없이 건조한 그녀의 표정은 환자의 감정이 전이 될 수 있는 부분을 모두 차단시켜 놓은 표식이었다. 남자의 흐느낌이 잦아들 때쯤 의사는 진단과 처방을 내렸다. 

 

“ 어떤 경우에 그렇게 오래동안 사귄 연인과의 갑작스런 헤어짐은 가족의 죽음에서 느끼는 슬픔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죠. 실제로 관계가 죽어버린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환자분이 느끼는 감정은 고통스럽겠지만 어떤 면에서 자연스러운 수순이에요.” 

 

진단을 마친 그녀는 차트에 증상과 처방될 약들을 적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 우선 생활과 수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까 생활을 지속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몇 가지 약을 처방해드릴게요. 우선 수면 유도제와 잠을 지속하게 해주는 수면 지속제를 함께 복용하세요. 항우울제는 복용 후 보름 정도 지나야 효과가 나타나니까 꾸준히 복용하시구요. 안정제는 외부생활 중에 힘들다고 느끼면 드시도록 하세요. 우선 한 달 치를 처방해 드릴 테니까 먹어보고 차도가 없다고 생각되면 다시 오시면 됩니다.”

 

 

 

# 7

그는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서 더이상 끼익 대는 소리가 나지 않을때까지 팔을 휘둘렀다. 피투성이가 되어 도망치려던 간호사는 쇼파와 남자 사이에 끼인 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신의 은총은 사라졌다. 그동안 잠깐 열렸던 진료실의 문틈 사이로 창백해진 남자 의사의 얼굴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간호사는 이제 더 움직이지 않았다. 하얀 제복 군데군데 피 꽃이 피어났다.

 

 

 

 

# 1

 

남자는 남자 의사를 마주 보고 있었다. 진료실의 천정은 대기실과 마찬가지로 별로 높지 않았고 적당한 사이즈의 책장 옆 벽에는 의사 자격증과 싸구려 같아 보이는 협회증같은 것들이 이리저리 걸려 있었다. 벽 쪽의 창은 블라인드가 삼분의 일 쯤 열려있어 대기실보다 덜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그 때 의사가 갑갑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그는 남자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는 남자의 친한 대학 후배였다. 정확히는 그 당시에 술친구들 그룹에서 친해진 동문 의대생이었는데 같이 밴드를 하다가 다툰 뒤로 몇 년간 안보기도 했지만, 후에 다시 만나 이십년 가까이를 술친구로 지냈다. 

 

 

의사는 남자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그와 함께 지내며 술에 취하면 종종 보여지는 그의 유쾌한 천박함과 칼날 같은 예민함 그리고 순수한 눈물을 동경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모습들은 매번의 데자뷰같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사디즘적 알고리즘을 가진 생물의 반복된 탈피로 보였다. 탈피가 반복되면서 그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는 이제 너덜너덜한 신경증 환자였다. 의사는 최선을 다해 항우울제와 요양을 선배에게 권했지만 남자는 이번에도 거절했다. 남자는 항우울제에 유난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대신 안정제가 떨어졌다며 후배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분량이 있으면 소량을 우선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남자는 약통을 손에 쥐고 나와 처방전이 안 나왔냐는 간호사의 말에 그렇다고 말 한 뒤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후배와의 대화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남자를 동정하지 않았고 고집불통이면서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루종일 뇌가 바삭거리는 느낌이 드는 날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아주 약간 낫다고 생각했다가 별 차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루종일하고 있었다. 물론 두 가지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기억들이 불러와 져야만 했다. 그리고 남자는 단지 약을 얻기 위해서 였다면 오늘 자신의 태도가 비굴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얻은 약통의 안정제를 모두 먹어버리기로 결심했다. 남자는 어차피 이걸 먹어버리지 않으면 자신이 결국 죽어버릴지도 모르므로 먹어버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 8

 

진료실에서의 요란한 소리가 끝나고 피범벅이 된 중년남자가 숨을 조금 헐떡이며 걸어 나왔다. 남자는 아직 움직인 적도 그와 눈을 마주친 적도 없었다. 그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지만, 여전히 공포심은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상황이라는 것은 지금 그가 가진 상황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서워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결국 무서워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눈이 건조했기 때문에 그는 또 눈을 껌벅거렸다. 중년 남자는 천천히 피곤해 보이는 발걸음으로 걸었다. 곧 그는 그의 맞은편 쇼파에 앉아 그를 바라보며 히죽거리다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